등단 50년 신작 펴낸 정호승 “시는 날 버린 적 없다”

14번째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
내 시어의 수원지는 비극·떨어짐에 주목
방탄소년단 RM·안치환 선택 스타 시인
“이미 쓰인 시는 독자의 것”
  • 등록 2022-10-12 오전 6:40:00

    수정 2022-10-12 오전 6:40:00

[이데일리 김미경 기자] “시를 쓰지 않은 날을 모아 보면 15년 정도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저는 시를 버렸는데, 시는 저를 버린 적이 없어요. 어머니처럼 내 손을 잡고 끌어줬죠. 시는 제 삶의 절대적 존재입니다.”

정호승(72) 시인이 시력(詩曆) 50년을 회고하며 한 말이다. 최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등단 50주년 기념 북토크’를 연 정 시인은 “시인으로서 오만했다. 이번 시집이 내게 준 가르침”이라며 가정을 이루고 생업에 쫓기며 시 쓰기를 놓았던 지난날을 고백했다.

1972년 등단한 정 시인은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1979년)를 시작으로, ‘서울의 예수’, ‘내가 사랑하는 사람’ 등 수많은 애송시를 남긴 스타 시인이다. 시에 관심이 없는 이라도 정 시인의 시는 한 번쯤 들어봤을 터다. 안치환 ‘우리가 어느 별에서’, 이동원 ‘이별 노래’ 등 노래로 만들어진 시도 80여편이나 된다. 특히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 ‘수선화에게’는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즐겨 읽는다고 알려져 큰 화제를 모았다.

정호승 시인(사진=조준우)
최근에는 등단 50년을 기념한 14번째 신작 시집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를 펴냈다. 2020년 ‘당신을 찾아서’(창비) 이후 2년만이다. 이번 시집에 실린 115편 중 9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미발표 신작이다. 시집 제목은 표제시 ‘택배’의 첫 문장에서 따왔다.

이번 시집은 죽음에 대한 사유가 유독 돋보인다.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유독 떨어질 낙(落) 자를 많이 생각했다”고 소개했다.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의 시 ‘낙과’를 비롯해 총 6편의 시에 ‘떨어질 락’ 자가 들어 있다. 시인은 “아파트 단지를 산책하다 바닥에 떨어진 채 향기를 내며 썩어가는 모과를 보고 썼다”고 했다.

문학평론가 이성혁은 해설에서 “죽음의 세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사유하는 것, 다시 말해 죽는 법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 이 시집이 보여주는 정호승 시인의 시적 윤리”라고 평했다.

정호승은 “슬픔은 곧 이별이다. 그중 죽음을 통한 이별이 가장 견딜 수 없는 이별이다. 슬픔은 다른 말로 ‘비극’”이라면서 “내 시의 발화점, 수원지는 비극”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느 하루는 택배가 왔는데 슬픔이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며 “택배는 잘못 오면 반환할 수 있지만, 그러나 비극이라는 택배는 반환할 데가 없더라. 나는 요즘 비극이라는 택배를 수용하며 받아들이고 있다”고도 말했다.

시인은 죽음을 통해 용서와 깨달음을 얻는다. 시인은 “부모가 자식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것이 죽음이라고 생각한다”며 “부모님을 보내며 마지막으로 큰 가르침을 얻었다”고 했다.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는 김수영 시인의 말도 인용했다. 정호승은 “이 비극의 시대를 살아온 고통의 현실이 바로 내 시의 스승”이라면서 “나는 시를 통해 나를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하고 내가 살아온 이 시대의 현실을 이해하려 노력해왔다. 썩어가는 모과향은 모과의 영혼의 향기다. 내 육신은 늙어가도 내 영혼만은 시의 향기로 가득 채워지기를 소망한다”고 했다.

시인은 인터넷 상에서 퍼지는 잘못된 시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에두르지 않고 직설을 쏟아냈다. 정호승은 “인터넷 상에서 시는 이미 죽었다”고 강조하며 “인터넷으로 시가 옮겨지면서 원문이 파괴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시대에 가장 피해를 받은 예술 분야는 시라고 생각한다”고 한탄했다. 그는 이어 “시는 토씨 하나, 행간까지도 중요한데 그런 건 다 무시하고, 뚝 끊어서 편집하거나 틀리게 올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며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게시물을 지워달라고 회원가입까지 한 적이 있다”고 헛웃음을 지었다. 이를테면 정 시인의 시 중 ‘풍경 달다’는 ‘풍경 소리’로, ‘강변역에서’는 ‘강변 옆에서’로, ‘밥 그릇’은 ‘개밥그릇’으로 입맛대로 붙이는 경우다. 그는 “진정한 독자라면 시집을 통해 원문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시대·세대를 불문하고 정 시인의 시가 많이 읽히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다른 사람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글을 대신 시로 써서 많이 읽히는 게 아닐까”라며 담담히 말했다.

“시를 쓰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왔을까. 시인은 죽어 흙이 되지만, 몇 편의 시는 남지 않나. 시인보다는 시가 더 중요하다. 이미 쓰인 시는 독자의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내 시를 사랑해준 독자들에게 이 시집을 바친다.”

정호승 시인이 지난달 29일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에서 열린 ‘등단 50주년 기념 북토크’에서 독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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