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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잘 손질한 양복 차림. 적어도 공식석상에선 그의 캐주얼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목까지 꽉 죈 넥타이는 물론이고,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모양까지. 꼿꼿하다. 한결같다. 흔들림 없다. 맞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다. “간송가 자손답다.”
전인건(49) 간송미술관장 얘기다.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장손이자 전성우(1934∼2018) 전 간송미술관장·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아들, 또 전영우(80)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의 조카로, 그는 3대째 간송 집안의 ‘가업’을 잇고 있다. 1938년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보화각’이란 이름으로 세운 간송미술관(1966년 개칭)의 문을 지키고, 조부 간송이 수집한 전통미술품을 보존하고 관리하는 그 가업 말이다. 내다 팔아 내 것으로 바꿀 수도 없는 엄청난 보물을 지키는 ‘문지기’이자 ‘감시자’.
버거운 일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이름을 훼손해선 안 되는, 유지·관리에 한 점 누락이 생겨도 안 되는, ‘명예’와 ‘현실’ 둘 다를 지켜내야 하니까. 시스템보다는 개인기, 재능보단 정신력이었다. 그런 전 관장이 간송미술관의 파격 변신을 시도한 적이 있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사무국장 시절, 미술관 담 밖으론 한 걸음도 떼지 않았던 소장품을 대거 끌어낸 일이다. 한 해 봄·가을 두 차례씩, 낡고 좁은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던 기획전이 중구 DDP로 나온 건 2014년. 첫 기획전을 연 지 42년 만에 감행한 ‘빗장 풀기’였다. 때마다 몰려든 관람객이 세운 몇백미터의 긴 줄을 사라지게 한 뒤 그는 “공개는 잘한 선택”이라고 말했다. “우리 문화재의 우수성을 알리자는 것이 할아버지의 유지였으니까”라고. DDP가 간송 소장품과 맞지 않는다는 둥, 40여년 무료전시 관행을 깨고 입장료를 받은 건 상업화로 가는 수순이라는 둥 입방아가 쏟아졌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한 5년을 지켜내고, 지난해 1월 마지막 외부전시인 ‘3·1운동 100주년 간송특별전: 대한콜랙숀’을 열며 그는 “이르면 오는 가을 수장고 공사를 끝내는 대로 성북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다른 소문이 솔솔 피어났다. ‘재정문제가 심상치 않다’는 거였다. 그러던 차에 결국 지난 21일 엄청난 얘기가 들렸다. ‘보물’ 소장품 두 점을 경매에 내놓는다는 소식이다. 대상은 통일신라시대 불상인 ‘금동여래입상’(보물 제284호)과 신라시대 불상인 ‘금동보살입상’(보물 제285호). 82년 간송미술관 역사에서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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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은 알려진 대로 일제강점기 전 재산을 털어 우리 문화재를 수집해온 인물. 증조부 때부터 서울 종로 일대 상권을 장악한 10만석 지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재산을 지켰다면 조선 몇대 갑부로 남았을 일. 하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민족문화재 수호에 한평생을 바치자’ 결심했던 거다.
간송이 일본으로 흘러간 문화재를 사들인 장면을 기억하는 일화는 한두 편이 아니다. 1933년 친일파 송병준의 집 아궁이 불쏘시개가 될 뻔했던 겸재 정선의 화첩 ‘해악전신첩’(보물 제1949호)을 시작으로, 고급 기와집 10채 값인 2만원을 일본인 골동품상에게 덥석 주고 얻은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 1000원을 부르던 거간꾼에게 1만 1000원을 쥐어주고 건네받은 뒤 눈물을 쏟았다는 ‘훈민정음 해례본’(국보 제70호) 등.
1936년에는 역사에 길이 남을 감동적인 드라마도 연출했다. 경성구락부(한국 최초 미술품 경매회사)에서 경매에 부친 ‘백자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국보 제294호)을 두고 일본 최고 골동상과 벌인 ‘기싸움’이다. 500원을 부른 시작가가 1만 4580원까지 치솟았지만, 간송은 기어이 낙찰을 받아내고야 만다. 1937년에는 일본에 정착한 영국인 변호사 존 개스비의 ‘고려자기 컬렉션’을 끌어오기도 했다. ‘청자기린유개향로’(국보 제65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국보 제66호), ‘청자오리형연적’(국보 제74호) 등 국보·보물 9점을 포함해 20점. 이를 위해 200평을 1마지기로 치던 충남 공주 땅 1만마지기를 팔았다. ‘민족문화유산의 수호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었다.
△‘현실’…상속세까지 겹쳐 쌓이는 재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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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년 동안 정부지원은 물론, 이렇다 할 수익원이 없던 것도 그들의 대쪽 같은 고집 때문이었다. 못 받았다기보다 안 받았으니까. 왜? “지원을 받으면 간섭도 받아야 한다”는 철학 때문이다. 그러니 재정난이 쌓이는 건 안 봐도 훤한 사정.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18년 전 전 이사장이 별세한 뒤 발생한 상속세까지 떠안았다. 간송의 소장품은 5000여점. 모두 간송미술문화재단에 귀속돼 있다. 이 중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국보에 대해선 상속세가 없으니 결국 이보다 더 많은 수천점의 소장품이 대상인 것으로 보인다. 오는 27일 케이옥션이 진행할 ‘금동여래좌상’ ‘금동보살좌상’의 경매의 시작가는 각각 15억원. 낙찰금이 얼마가 되든 재정난을 해소하는 데 턱없이 부족할 거란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여론이 들끓고 상황이 커지자 전 관장과 간송미술문화재단은 입장문을 내고 “송구하다”고 했다.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는 소리다. 정작 ‘지못미’를 외쳐야 하는 담 밖의 이들을 향해 “재정 압박에 어려운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간송의 미래를 위해서니 혜량해 달라”고 했다.
‘왕관의 무게 재기’라고 할까. 머리에 꽂히는 그 하중이 어느 정도일지 누가 안다고 하겠나. 실제 전 관장은 평소 “간송의 손자란 부담감은 없느냐”는 짓궂은 질문에 “왜 아니겠느냐”며 웃어 넘겼다. 그럼에도 지론은 ‘칼’ 같았다. “할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문화재를 남겼다는 생각은 안 한다.” 이번 결정에 앞서서도 그는 조부를 가장 먼저 떠올렸을 터다. 해방 후 간송의 한 인터뷰. “아직도 모으시나”란 물음에 간송의 대답은 이랬다. “이제 독립을 했으니 난 좀 게을러져도 된다. 이제 누가 사도 우리 것이지 않은가.” 과연 이 장면이 전 관장에게 위로가 됐을지 비수가 됐을지,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