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를 둘러싼 단상은 예부터 유명 작가들의 입과 손을 탔다. 에밀 졸라는 1873년에 쓴 ‘파리의 뱃속’에서 특유의 문학성을 드러냈다. “뚱뚱하고 생기 없는 모습의 여자 상인들이 파는 소금절임 대구, 그 모습에 먼 여행을 떠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상상력은 또 어떤가. “만일 알들이 부화하는 것을 막는 사고가 전혀 없어 모든 알이 성체로 자라난다고 가정해보자. 불과 3년 후 우리는 대구의 등을 밟으며 대서양을 건널 수 있을 것이다”(‘요리대사전’ 1873).
그런데 이렇듯 화려한 이력의 물고기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을 거다. 대구가 사라진다는 말이다. 다만 그 과정이 단순치 않다. 지난 1000년사를 다시 짚어야 할 정도니. 대구의 역사냐고? 천만에. 인간의 역사다. 대구가 뒤흔든 인류의 경제사다.
‘세계의 역사와 지도가 대구어장을 따라 변화해 왔다.’ 이 기발한 발상은 한 저널리스트에서 나왔다. 어부 집안 출신인 그는 대구잡이 저인망 어선에도 올라탄 적이 있다. 성과물은 시카고트리뷴의 카리브해 특파원으로 뛰면서 만들어졌다. 7년여간 대구를 좇다가 종국엔 대구를 축으로 세상을 되돌려보자고 했다. 한 토막 생선의 반향은 컸다. 대구잡이를 둘러싼 연대기적 궤적으로 노예무역, 산업혁명, 해양쟁탈전의 대서사시는 촘촘히 재편집됐다.
▲물고기 때문에 치열한 전쟁과 혁명을?
17세기 영국의 종교박해를 피해 바다를 건넌 이들의 희망도 대구였다. 매사추세츠 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지 25년 만에 이들은 들끓는 대구를 거둬 거부가 됐다. ‘대구 귀족’이란 말도 생겨났다. 18세기 서인도제도의 노예무역을 성사시킨 것도 대구다. 노예들이 하루 16시간씩 설탕을 생산하는 중노동을 버텨낼 수 있던 건 대구의 고단백 덕이다. 미국의 독립혁명도 대구와 무관치 않다. 영국이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의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무역까지 제재하자 식민지인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1782년 영국·미국의 평화협상을 복잡하게 한 문제 역시 대구잡이 권리였다.
▲아이슬란드가 갑자기 부유해진 건…
19세기의 큰 변화라면 유럽식민지에 묶여 있던 노예제도가 폐지된 것. 하지만 타격은 대구어업에 가해졌다. 시장이 줄어든 거다. 살 길을 모색하기 위해 눈을 돌린 건 기술이다. 1881년 영국은 처음으로 증기동력의 트롤선을 만들어낸다. 냉동장치가 있는 저인망 어선은 대구잡이의 혁신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전쟁은 그때부터였다. 대구를 확보하기 위한 영해선 싸움이 본격화된 거다. 2차대전 이후 급격히 성장한 아이슬란드의 국부는 이 전쟁에서의 승리와 연관이 깊다.
▲한 토막 생선으로 의도한 성찰과 경고
1997년 미국서 출간된 책은 ‘세계사를 조명하는 새로운 도구’란 극찬까지 받았다. 그 이듬해 서둘러 국내서도 번역서가 나왔다. 하지만 이내 절판이 되고 만다. 당시만 해도 대구의 드라마틱한 연대기가 우리를 울리지 못한 탓이다. 다시 나온 책이 우연인가. 아닐 거다. 16년의 공백 동안 우린 사라져가는 물고기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게 됐다. 대구와 비슷한 숙명의 물고기가 국내에도 있지 않은가. ‘왕눈폴락대구’. 더 익숙한 이름은 명태다.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명태는 동해서 발끝에 차이는 생선이었다. 하지만 치어까지 싹쓸이하는 인간의 욕심이 결국 명태의 씨를 말렸다.
저자의 짓궂은 의도에서 실린 J. 스미스 호먼스의 장담은 사실 뼈아픈 경고다. “중간 크기의 대구 한 마리에서 알 938만개를 발견한 적 있다. 이런 숫자 앞에서는 이 어종을 전멸시키려는 인간의 어떤 노력도 허사가 되고 말 것이다”(‘상업 및 상업적 항해 백과사전’ 1858).
사라지게 될 것이 정말 대구뿐이겠는가. 늘 문제는 인간, 그래서 그 끝은 더 큰 비극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