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터키화 폭락…관광객 '쇼핑찬스'vs현지인 '소득 반토막'

터키생활 11년차 기자 출신 작가가 전하는 생생 리포트
명품숍 앞 외국인 장사진, 사설환전소에선 환치기 극성
리라 월급받는 현지인 상실감, 치솟는 물가 걱정에 주름살만
리라화 가치 하락 반등세?…"아직 불은 꺼지지 않았다"
  • 등록 2018-08-16 오전 6:03:00

    수정 2018-08-16 오전 7:17:56

이스탄불 명품거리 니샨타시 루이비통 매장 앞. 명품 숍 앞엔 중동, 유럽, 한국, 중국 등에서 온 관광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이스탄불=이데일리 김현숙 통신원·‘이스탄불 홀리데이’ 저자]이미 몇 개월 전부터 터키화(貨)의 가치가 떨어질 거라는 소문은 있었다. 1달러당 4리라(약 290원)였던 지난 4월부터 달러·리라 환율이 조만간 7리라(약 165원)를 넘어 10리라가 될 거라는 말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물론 경제 방송 채널에서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골목마다 ‘Satlık(사틀륵·‘매물’이라는 뜻의 터키어)’이라 써 붙인 집들이 늘어났다. 어떤 이는 집과 차를 팔아 달러나 금을 사둔다고 했고, 부자들은 리라를 달러로 바꿔 유럽이나 미국에 부동산을 매입했다.

그저 ‘카더라’ 쯤으로 치부하던 그 설마, 설마 하던 일이 지난 10일(현지시간) ‘블랙 프라이데이’에 일어났다. 하루 만에 터키화는 14% 떨어진 1달러당 6.46리라, 주말을 지나 월요일엔 7.01리라를 찍더니 6.9리라로 마감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드로안 터키 대통령 지지자가 미국의 경제 보복에 대한 반발로 미 달러를 불태우고 있다.(사진=유튜브 캡처)
◇사설환전소 난데없는 성황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그랜드 바자르 사설 환전소는 난데없는 성황을 맞았다. 1000달러, 2000달러를 손에 쥔 소액 투자자들이, 오르내리는 환율에 맞춰 달러를 사고팔며 환치기에 여념이 없었고, 주말 내내 샤넬, 루이뷔통, 버버리 등 명품 숍엔 관광객들이 달러·리라 환율 인하로 저렴해진 명품 구입을 위해 장사진을 이루었다. 대부분 중동과 유럽, 한국인을 포함한 아시아 관광객들이었다. 30도가 넘는 더위에 30분 이상 줄을 서 매장에 들어가는 모습은 현지인들에겐 낯선 풍경이다. 한국 포털사이트엔 하루 종일 ‘터키 버버리’가 상위 검색어에서 내려올 줄 몰랐다. 런던 본사에서 운영하는 버버리 터키 온라인 쇼핑 홈페이지에는 리라 기준으로 가격이 매겨져 있어 달러·리라 환율 인하로 그만큼의 할인 혜택을 볼 수 있다. 배송지는 터키. 정상 가격의 반의 반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는 소문이 돌아, 해외 직구(직접구매) 대행자는 물론, 터키 현지 배송대행지를 찾는 문의가 터키 한인 사이트에 넘쳐났다. 심지어 터키 여행을 위한 항공권 문의도 쇄도했다고 한다.

여행자들에게 지금 터키는 세계에서 쇼핑하기 가장 좋은 나라, 생활물가 저렴한 나라가 돼 있다. 500㎖ 생수 한 통에 1리라(약 200원), 어른 머리 크기의 15kg 수박이 15리라(약 3000원)밖에 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행객의 얼굴에 미소가 절로 번진다.

약삭빠른 어떤 이는 지금이 터키 리라화 투자 찬스라며 한국에 살면서도 은행을 찾아 외환계좌를 트고 수백만 원으로 1터키리라를 163원에 구입해 해외 계좌에 예금해뒀다고 무용담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조만간 터키로 여행을 가려는데 투자 겸 준비라고 했다.

시시각각 변동 환율이 고시되는 이스탄불 사설 환전소
◇부자들에겐 천재일우의 기회지만…

리라화 가치 폭락은 터키에서 달러나 유로로 수익을 올리는 이에게는 쉽게 돈을 버는 천재일우의 기회이자, 돈 있는 사람들에겐 반값이 된 부동산을 사들일 흔치 않은 기회가 되고 있다. 반면, 터키 리라로 월급 받고 생활해야 하는 터키 현지인에게는 멀쩡히 앉아서 도둑질을 당하는 상실감을 맛보게 했다.

터키 리라로 월급을 받는 고교 지리 교사 딜렉은 10년째 팔순 노모를 돌봐주고 살림을 맡아 하는 입주 도우미에게 달러로 주는 월급이 이미 자신의 한 달 수입을 웃돌아 울상 짓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터키 리라가 하강 곡선을 그리더니 올해 들어서는 월급만으로는 도우미의 월급이 감당이 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입주 도우미의 휴가 날짜를 더 늘려야줘야 했다.

벼르고 별러 열흘 전 계약한 자동차를 찾으러 갔더니, 계약서에 적힌 가격보다 우리 돈으로 200만 원가량이 더 올랐으니 차액을 내라고 해, 결사적으로 항의해 겨우 원래 가격으로 자동차 키를 받아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온라인 쇼핑의 가격은 몇 시간 간격으로 바뀌고 있다.

섬유를 재가공해 수출하는 터키의 한 업체 사장은 원자재를 수입에 의존해 쓰고 있는데 리라화 가치 폭락으로 앞날이 막막한 상황이라고 하소연했다.

열흘 전에 투자 목적으로 집을 산 한 교민은, 계약서에 잉크가 마르자마자 30% 가까이 손해를 봤으니 이걸 언제 회복하느냐며 망연자실했다. 그렇다면 지금이 한국에서라도 돈을 끌어와 터키 부동산을 살 기회일까? 현재로선 흔쾌히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터키는 외국인 명의로 부동산을 살 수 있지만, 터키 경제는 외자를 유치해 건설에 투자하는 전시행정에 몰두하고 정경 유착, 규모를 알 수 없는 지하 경제가 횡행하는, 건강하지 않은 경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터키의 경제 위기는 아주 오래전부터 예견돼왔다.

요 며칠 사이 2년 만기 터키 국채의 이율은 26%를 넘었다. 투자가 아닌 투기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터키 중앙은행은 보유 외화를 풀고, 통화 안정을 위해 금리를 올리고, 해외 투자 환경 개선을 위한 정부의 대책이 발표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쉬워 보이지 않는다. 14일 오후 들어 리라화는 터키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로 소폭이나마 반등 조짐을 보였다. 하지만 터키 가란티 뱅크(Garanti Bank)의 제너럴 매니저 알리 푸아트 에르빌(Ali Fuat Erbil)은 “아직 불이 꺼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조심스레 관망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이번 터키화 폭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터키산 철강 및 알루미늄 관세 인상은, 스파이 혐의로 가택 연금중인 미국인 목사 브론슨의 석방을 요구하는 미국의 강력한 경고 메시지다. 브론슨 목사를 석방하지 않을 시 더 큰 경제 제재가 예고된 상태지만, 이에 대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자국의 주권 침해라며 오기를 부리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까다로운 외교 문제를 어떻게 풀지에 전 세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터키 정부의 경제 정책 문제는 수면 아래로 내려가고, 현지 미디어는 연일 리라화 가치 폭락의 원인으로 미국의 경제 전쟁을 부각시키고 있다. 에르도안 지지자들은 달러를 불태우는 퍼포먼스를 SNS에 공유하며 미국에 강한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더해, 14일 오후 에르도안 대통령은 소속정당인 정의개발당의 창립 17주년 기념연설에서 미국산 전자 제품 불매운동(“아이폰 대신 삼성을 사라”)을 선언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2년 전 그리스의 채무 불이행(디폴트) 사태처럼 현금을 집단적으로 대량 인출(뱅크런)하거나 현금인출기에 현금이 동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대다수 터키인들은 다음 주 이슬람 최대 명절인 희생절(쿠르반 바이람·21~24일) 이후를 걱정하고 있다. 연휴가 지나고 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서다.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가 아닌 ‘작년이 더 좋았어’라고 말하는 터키인 이웃들과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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