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마부인 벗고 사람냄새 나는 배우로..."

뮤지컬로 돌아온 배우 안소영..7년 미국 생활 접고 귀국
  • 등록 2005-10-02 오전 10:52:53

    수정 2005-10-02 오전 10:52:53

[조선일보 제공] “미국에서 SBS 드라마 ‘파리의 연인’을 보고 다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꼭 다시 해 연기자로서 인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지금은 먼저 ‘뜨거운 홍차를 같이 해’(가제)라는 뮤지컬을 준비하고 있어요.”

‘애마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 안소영(46)씨는 지난 5월 7년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7월에는 KBS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 출연했고 8월에는 모바일 누드 화보집을 냈다.

“예전 영화배우는 영화만 해야했지만 지금은 만능 엔터테이너가 돼야하잖아요. 앞으로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고 싶습니다.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에서는 조금 다른 면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결국 도회적인 여자로 출연했네요.”

그녀는 앞으로 구수하고 인간적인 매력이 담긴 역을 맡고 싶다고 한다. ‘사람 냄새 나는 배우’ ‘늙었으니까 주름도 보이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누드 화보집을 낸 것은 조금 후회된다고까지 한다. “사실 모바일 누드 화보집보다는 사진전을 열고 싶었어요. 휴대폰을 많이 사용하는 젊은 세대들은 저를 잘 모르잖아요. 누드에 대한 편견도 많은 편이죠.”

안씨의 누드 화보집은 서울여대 사진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녀의 동생 안기천씨와 서울 근교와 제주도에서 작업했다. “동생과 촬영하는 것은 대체로 편했어요. 하지만 동생도 이런 작업은 처음이라 서로 헤매기도 했죠. 예전에는 승마를 배워 말을 곧잘 탔는데 오랜만에 타려니까 잘 안되더라고요. 예전 기억은 새록새록 났죠.”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정인엽 감독의 ‘애마부인’(1982년) 이야기다. 23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애마부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저는 ‘애마부인’이라는 작품에 애증을 가지고 있어요. 영광이자 굴레죠.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었는데 이후 괜찮은 감독님들께서는 저를 피하셨어요.”

안씨는 ‘애마부인’ 이후부터 제대로 된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자신을 섭외한 감독들은 모두 벗기려고만 했다고 하소연한다. “너무 괴로웠어요. 어린 시절부터 모든 생각이 영화로 향한 학생이었는데 말이죠. 학교에서 정말 골칫거리였어요. 수업도 빼먹고 영화판 현장에만 다녔으니까요. 부모님도 제 고집을 꺾지는 못하셨는데 말이에요.”

어려서부터 영화에 빠진 안씨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연배우 비비안 리의 허리 사이즈가 19인치라는 이야기를 듣고 21인치까지 허리를 줄인 적도 있단다. 그녀는 허리에 비해 가슴이 큰 편이어서 항상 어깨를 구부리고 다녔다고 한다.

“연기자로서 데뷔는 이해랑 선생님의 연극 ‘죄와 벌’로 했어요. 영화는 임권택 감독님의 ‘내일 또 내일’로 데뷔했고요.” 중학교 때 처음 만난 임권택 감독은 그녀에게 “공부를 열심히 한 후에 좋은 배우가 돼라”고 말해주었고 결국엔 안씨를 영화계로 인도했다.

“신협에서 활동할 때는 박암 선생님께서 이름이 촌스럽다고 하셔서 작명하시는 분에게 안소영이라는 이름을 받았어요. 본명이 안기자여서 학교 다닐 때 놀림도 많이 당했죠.”

‘애마부인’ 이후 안씨는 17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섹스 심벌’로 고정된 이미지에 지쳐 1987년 강대진 감독의 ‘몽마르트 언덕의 상투’를 끝으로 일단 영화계를 떠났다.

“의상실을 운영하면서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어요. 가수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동생들 학비를 마련해야 했죠. 큰 동생은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을 공부했고 작은 동생은 미국 보스턴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어요.”

이후 그녀를 영화계로 다시 부른 것은 박광수 감독. ‘그 섬에 가고싶다’(1993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년)에 출연했다. “하지만 촬영하면서 너무 부끄러웠어요. 연기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죠. 정말 완전히 영화계를 떠나고 싶었어요. 공부를 하고 나서 할머니가 된 후라도 다시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안씨는 1997년 미혼모가 됐고 사업까지 망해 1998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아들과 단둘이서 살았어요. 처음에는 저도 어학원을 다녔는데, 나이 들어서 공부하려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또 먹고사는 게 큰 문제여서 아이 키우면서 공부하기도 어려웠고요.”

그녀의 미국 이름은 앤(Ann). 같은 반 학생들이 “앤은 교실만 나가면 배운 것 다 잊어버리지?”라고 자꾸 놀렸다고 한다. “미국 생활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제 삶은 없었죠. 아이에게 모든 것이 맞춰졌어요. 미국에 가서 가장 먼저 산 게 골프화였는데 한번도 못 신어보고 새 신발인 채로 그냥 가져왔어요. 그러고 보니 하이힐 신은 기억도 없네요. 맨해튼 바를 가본 적도 없고요. 연기 공부를 위해 소극장 연극만 몇 편 봤을 뿐이죠.”

안씨는 뉴저지에서 명품점과 ‘황부자 순두부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아들 이름이 황도연이거든요. 우리 아들 부자 되라고 황부자라는 이름을 붙였죠.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이에요.” 그녀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밝힐 필요가 없다고 한다. 미국에 있을 때 사망 소식을 접했다고만 했다.

“새로운 사람 만나서 결혼할 생각은 없고 그냥 아이와 열심히 살래요. 아들이 제 인생의 전부예요.” 안씨는 어릴 적 싱글맘을 꿈꾼 적이 있다고 한다. 결혼해서 남편과 사는 것보다 아이와 단둘이 살고 싶어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 키웠어요. 도시락도 한식으로 싸주고 한국어도 가르쳤죠.”

그러면서도 은근히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는 불만을 털어놓는다. “한 반에 학생들이 너무 많아요. 미국은 보통 20명 정도인데 한국은 40명이 넘죠. 선생님 한 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인원이에요. 아이가 중학교 2학년 때쯤 미국으로 다시 가겠다고 해요.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선언하고 왔대요.”

이어 한국인은 자기과시적인 성향이 강하다는 것도 꼬집는다. “귀국해보니 ‘폼생폼사’로 사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아요. 차도 좋은 차 타야 하고 옷도 좋은 옷 입어야 하죠. 특히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인데 차들이 너무 커요. 연예계도 마찬가지로 과대포장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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