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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내가 안이라 했을 때/ 그는 늘 밖이라 했다/ […] / 내가 늘 푸른 하늘 시려, 눈물 지을 때,/ 그는 날마다 붉어지는 땅/ 아파 미소 지었다/ […] / 사랑과 진리와 아픔까지도/ 그는 늘 밖이라 하지만 나는/ 항상 안을 생각한다”(배찬희 ‘뫼비우스 띠’·1984).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니 섬광처럼 스치는 게 있다. 이미 오래전 머리에 박힌 시 한 편이다. “그 실현을 기다리며 오늘을 기다렸다”고 ‘설을 푸는’ 건 누가 봐도 대단한 거짓말일 테고. 그래, 자동연상쯤으로 해두자. 굳이 연관 지을 이유가 없는 두 화면을 한꺼번에 들여다보게 한 자극 혹은 동기부여. 두 화가를 나란히 세우고 보니 섬광은 확신이 됐다. 다름의 시간을 따질 수 있는 건 같음의 공간이 있기 때문이니까. 안과 밖으로 갈라지는 것도 안팎의 경계에 함께 선 다음의 일이니까.
선배작가 이세현(53)과 후배작가 채지민(37). 두 사람에게는 흔히 뭉뚱그리는 ‘중견작가’와 ‘차세대작가’란 타이틀에 합당한 간극이 있다. 이미 상당한 나이차(16년)에다가 출발도 달랐다. 이 작가는 개인보다 국가의 정체성을 강제하던 시절에 학교(홍익대 서양화과)를 다녔고, 채 작가는 새천년 희망이 개인의 정체성을 강요하던 시절에 학교(서울대 서양화과)를 다녔다. 굳이 이력상 공통분모를 꼽자면, 결국 둘 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유학(영국 런던예술대 첼시칼리지)을 떠났고, 결국 어떤 형태로든 그 답을 찾아왔다는 것. 어쨌든 두 사람의 시간이 겹친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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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각자 낸 결론이 지금 저 벽에 나란히 걸린 그림일 거다. 다른 눈, 다른 붓, 다른 색으로 빚은 전혀 다른 풍경. 그런데 말이다. 그럼에도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보이는 거다. 세상 어디에나 있는 요소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전경을 그린다는 것, 끝내 조화를 이루지 못한 ‘완성하지 못한 풍경’이란 점, 그래서인지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게 강렬하다는 점.
이들 선·후배 작가를 서울 성동구 서울숲2길 아뜰리에아키에서 만났다. 두 작가는 아뜰리에아키 10주년 기획전 1부 ‘시각 시선 그리고 시작’ 전(5월 12일∼6월 18일), 2부 ‘확장된 시선’ 전(6월 23일∼7월 31일)에 각각 작품을 걸었다. 2010년 처음 간판을 걸고 50여회 전시를 통해 70여명의 작가를 소개해온 아뜰리에아키가 지난 10년 고락을 함께 나누고 다시 10년 또 그럴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작가 이세현’을 만든 배경에는 ‘붉은 산수’가 드리워져 있다. 이 작가는 우리 땅에 뿌리내린 산과 물, 땅과 집 등을 맑은 선홍색 핏빛 하나로 그려내는 작업을 해왔다. 장구한 풍광만이 아니다. 분단국가 현실, 개발을 핑계 삼은 자연파괴, 상식을 뭉개는 사회문제까지 들였다. 한눈에 들어오는 전경도 아니다. 모자이크를 한 듯, 퍼즐을 맞춘 듯, 연결되지 않는 요소를 툭툭 얹어낼 뿐이니까. 이런 그의 작업을 먼저 알아본 건 한국화단이 아닌 유럽화단이었다. 다 늦은 마흔 살에 떠난 유학, 그 결과물인 졸업전에 내놨던 작품이 모조리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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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산수’에 대한 전력질주는 그때부터였다. 그럼에도 ‘붉은’은 여전히 어렵다. “붉은색을 금기하던 시절에 공부를 하지 않았나. 공포감이 없을 수 없다. 하지만 그 지점에 내가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불편 너머에 아름다움, 유토피아 너머에 디스토피아가 존재한다는 것을.” 수려한 산수가 품고 있는 묵직한 현실 말이다. 결국 자기검열에 대한 극복은 이 작가의 몫이었다. 싸워야 할 적은 둘이었다. 안에 놓인 생각, 밖에 흐르는 시선.
그러던 그가 이번 전시에 ‘푸른 산수’ 한 점을 꺼내놨다. 15년 이어온 붉은 싸움을 접어가는 건가. “붉은 산수는 정치적·사회적 이슈에 반응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선가. 복닥거리는 인간의 난장에도 홀로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 더 다가가고 싶었단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 강해지면서 색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도 했고. 푸른색은 휴식이다.” 하지만 이내 포장한 속마음도 드러냈다. “역사는 다양하게 기록하지 않는다. 정확히 기록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게 역사가 아닌가. 내 세계를 확고하게 만들어보고자 색을 바꾼 거다. 이쪽저쪽 흔들리면서 중심을 잡아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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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스토리보단 ‘상황’이었다는 거다. 이는 작품에 ‘절대 얼굴은 보이지 않는 인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풍경이 있으면 이야기를 만들기 마련 아닌가. 사람을 그리다 보니 의도치 않게 그들이 주인공이 되더라. 그래서 형태는 남기되 캐릭터는 빼버리자 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 ‘누구냐?’가 아니라 ‘아무개!’가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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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디스토피아 vs 현실·비현실…같은 길을 달리 걸을 뿐
굵은 선 하나를 세운 선배나, 이제 그 선을 그어야 하는 후배나 작품에 대한 고민은 멈추질 않는다. 붓을 쥔 이들을 번번이 좌절케 하는 건 그림에 들일 형상이나 색만이 아니니. 시스템이 아닌 개인기로 뚫어야 하는 한국미술계의 여건·조건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두 작가는 입을 모아 경직된 문화를 지적한다. “미술을 취미나 생활로 하지 않는다면 감상은커녕 즐길 수조차 없는 분위기지 않은가. 다들 ‘재능이 없어서 잘 몰라요’라고 한다”(이세현). “영국에선 농담으로도 예술을 말할 수 있는데 한국에선 그것도 어렵다. 한낱 대학 졸업전에 몰려든 인파를 보면서 많이 놀랐다. 결국 한 나라의 문화를 만드는 건 관심과 인식의 문제인 듯하다”(채지민).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접경에 서 있는 선배작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선 후배작가. 어느 쪽이든 발을 더 들이밀 수도 완전히 빼버릴 수도 없다. 왜?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기 때문일 거다. 과연 선배의 유토피아에 후배의 현실을 들일 날이 올 수도 있는가. “트렌드도 중요하지만 내 것을 꾸준히 이루려는 사람을 이길 순 없다는 생각이 갈수록 강해진다”는 후배의 말에 선배는 “치열한 작업이든 무의미한 작업이든, 늘 자유롭게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같은 길을 다르게 걷는 두 작가. 결국 안인 듯 밖인 ‘뫼비우스 띠’는 이렇게 계속 감겨 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