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래현의 대표작 ‘노점’(1956). 1956년 ‘제5회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대작(267×210㎝)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연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에 걸었다. 한국전쟁 이후 어려웠던 여인들의 생활상을 입체파적 시도로 그려내면서 한국화 특유의 온화함을 덜어내고 대신 뾰족함을 박았다. 각 세운 부드러움이란 게 이런 것 아닐까(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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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순수한 가정주부가 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것을 희생하고 예술에만 몰두한다는 것도 허용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이니만큼 항상 마음이 복잡한 것만은 어찌할 수가 없는 일이다. … 나는 지금 남편에 대한 시중을 정신적인 면으로 돌려버리고 말았다”(박래현, 수필 ‘남편시중기’ 1962).
이제 아이가 넷이다. 남편은 시대가 주목하던, 청각장애를 가진 천재화가. 그렇다고 자신을 대충 내려놓고 살 만큼 욕심이 없지도 않았다. 집 밖에선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촉망받는 신예라는데. 이쯤 되면 말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가. 고민과 갈등이 점점이 박힌 세월 말이다. 게다가 때는 가부장제가 첩첩이 덮인 1950∼1960년대다.
본디 여자에게 일과 가정은 화해가 불가능한 조합이라 했던가. 이를 극복하는 건 어쩌면 신의 범주일 텐데. 그런데 말이다. 그이의 붓끝은 신의 범주를 농락한 건지. 막내딸이 태어나던 1956년. 그이는 두 개의 ‘대통령상’을 거머쥔다. 대한미술협회전에서 ‘이른 아침’(1956)이 수상했을 때만 해도 “잘 그린 그림이지만 운이 따라서”라 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몇 달 뒤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에서 ‘노점’(1956)이 다시 최고상을 받아내자 그냥 입을 닫고 탄식만 흘릴 수밖에. “아! 아이 넷 딸린 그 여자화가가….”
우향 박래현(1920∼1976). 그이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이 새로운 팩트 외에 이제껏 해오던 그대로라면 그이는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다. 엄청난 성취와 작품을 남기고, 그렇게 불리다가 그렇게 떠났다. 만약 ‘박래현’이란 이름이 낯설다면 그건 여전히 운보에 가려 있는 탓일 터.
| 박래현의 진가가 발휘된 후기추상 ‘작품’(1966∼1967). 고대문명에서 발견한 원시미술에 결합한 한국의 서민적 전통미를 먹의 번짐으로 교묘히 끌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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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마련한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은 한 시대를 거스르지 않고 거스른, 20세기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여성화가 박래현을 다시 들여다보는 자리다. 군산 피란시절, 어려웠던 여인들의 생활상을 입체파적 시도로 그려낸 ‘이른 아침’과 ‘노점’ 등 그이의 초대형 걸작은 물론 숨어 있던 역작을 모조리 꺼내, 138점을 걸었다. 30여명 개인소장가의 작품을 모으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20여점을 보태고, 가나문화재단·아라리오·뮤지엄산 등, 국내 미술계를 탈탈 털어 모았다.
연대기보다는 주제로 묶어 그이의 색깔을 좀더 선명하게 부각하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 한국화에 ‘현대’를 들였던 시기를 도입부로, 가정생활과 병행한 예술세계, 비로소 넓은 세상에 나가 끌어낸 ‘추상’의 맛, 거기서 더 나아가 기술로 다져낸 선구자적 판화에 대한 도전까지. 그렇게 박래현의 압도적인 영역이었던 회화와 판화, 태피스트리란 세 매체를 연계한 의미로 ‘삼중통역자’란 타이틀을 빼냈다. 하지만 이는 그이의 사전에서 슬쩍 빼온 데 불과하다. 남편 운보와 미국여행을 갔던 어느 해, 박래현은 영어를 듣고 남편에게 수화로 의미를 전달하던 스스로를 이미 그렇게 불렀다는 거다.
| 박래현의 ‘생’(1961). 1962년 ‘제1회 세계문화자유회의초대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얼핏 추상처럼도 보이지만 소쿠리를 이고 있는 여성과 위태롭게 날개짓하는 새가 선명히 들어있다. 이제 막 추상예술로 도약하는 박래현 자신의 생을 은유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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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전, 10주기에 임박한 1985년 열었던 회고전 이후 사실상 처음이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운보가 생존했던 때라 남편의 영향력이 적잖이 작용했을 거란다. 정말 그랬다면 이번 전시야말로 박래현의 정수를 내보인 첫 자리일 수 있다.
△‘총독상’ ‘대통령상’ 휩쓴 실력으로 추상·판화까지쪽진머리에 앞섶을 여민 저고리, 코끝이 선 고무신. 형체가 아니라면 빛은 또 어떤가. 황토물 뚝뚝 떨어지는 피부, 벽, 옷까지. 분명 한국의 모양과 색이 보이는데, 마치 서양의 어느 시골마을에 와 있는 듯하다. 굳이 먹을 쓰지 않고 엷은 담채로 겹겹이 쌓아내고 마땅히 있어야 할 필선도 보이질 않는다. 한국화 특유의 온화함을 덜어내고 대신 뾰족함을 박았다. 각 세운 부드러움이란 게 이런 것 아닐까. 규모도 단순치 않다. 200호를 훌쩍훌쩍 넘기는 화면이 흘러 내린다. ‘이른 아침’(253×194㎝)과 ‘노점’(267×210㎝) 얘기다.
| 박래현의 ‘이른 아침’(1956).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은 작품이다. ‘노점’(1956)과 마찬가지로 입체파적 시도로써 한국전쟁 직후 동네시장 풍경을 소재로 했으나 보다 치밀한 구성력이 돋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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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는 사실 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작품 한 점이 더 있다. 1939년에 떠난 일본유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총독상을 받은 ‘단장’(1943)이다. 주최 측이 더 놀랐을 거다. 온통 남성밖에 없던 화단에 웬 여성이, 그것도 총독상을 낚아채다니. 기거하던 하숙집 딸이 화장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작품은 검은 옷 소녀와 붉은 화장대만으로 화면을 짠 대담한 구성과 화장솔·머리카락·손동작 등 섬세한 세부묘사가 조화를 이루는 일본화풍이다. 하지만 이런 풍을 이후엔 찾기가 어렵다. ‘여인의 생활풍속’은 끝까지 박래현의 작품세계에 남아 있지만.
그보다 ‘단장’은 그이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인 작품이 되기도 했는데, 시상식을 위한 귀국길에서 운보를 만나 1947년 결혼에 이른 거다. 이후 박래현의 화업은 늘 운보와 함께였다. 1948년부터 1971년까지 12회에 걸쳐 한국 첫 ‘부부전’을 이어갔고, 역시 운보와 중진 동양화가들이 함께 결성한 백양회를 디딤돌 삼아 동양화단을 움직였다.
|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 전경. 1939년에 떠난 일본유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총독상을 받은 ‘단장’(1943)이 앞에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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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여인과 정물을 독특한 화풍으로 그려냈지만, 사실 박래현의 진가는 ‘추상’ 작업에서 본격 발휘가 된다. 1960년대 초반 형체를 지우고 색으로 에너지를 뿜어낸 이른바 ‘색채추상’부터다. 연작 ‘잊혀진 역사 중에서’(1963), 연작 ‘작품’(1964) 등이 그때 만들어졌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더 과감해졌는데. 1964∼1965년 미국여행 중 들러봤다는 뉴욕 아메리칸인디언박물관에서 몰입한 원시미술에 한국 서민적 전통미를 결합한 ‘영광’(1966∼1967), 연작 ‘작품’(1966∼1967) 등을 쏟아낸 거다. 얼핏 고대 가면이, 얼핏 엽전도 보인다는, 박래현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맷방석’ ‘엽전’ ‘금줄’ 시리즈다.
|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 전경. 1964∼1965년 미국여행 중에 푹 빠졌다는, 뉴욕 아메리칸인디언박물관에서 찾아낸 원시미술에 한국 서민적 전통미를 결합한 후기 추상작품들이 걸려 있다. 왼쪽부터 ‘영광’(1966∼1967), ‘뿌리는 살아있다’(1971). ‘작품’(1966∼1967)(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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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취적인 그 행보는 ‘판화’로 이었다. 마흔아홉에야 떠난 미국유학에서 판화의 세계에 입문한 거다. 국내에선 누구도 해보지 못했던 다색동판화기법, 비스코시티기법, 잘라낸 동판으로 한 면을 완성하는 기법 등 독특한 판화가 세상에 찍혀 나왔다. 전시에는 ‘시간의 회상’(1970∼1973), ‘바다의 현상’(1970∼1973), ‘태양의 시대’(1972) 등이 걸렸다. 손뜨개 기법으로 만든 ‘태피스트리’ 역시 그즈음 선뵀다. 판화의 기술이 회화를 입은 형태라고 할까.
| 박래현의 독보적인 작업인 동판화 ‘태양의 시대’(1972)와 ‘태양의 시대’(1972). 1969년 뒤늦게 떠난 미국유학에서 판화의 세계에 입문한 박래현은 이후 국내에선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다양한 판화기법을 고안한 작품들을 차례로 내놓기 시작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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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래현의 태피스트리 ‘작품’(1970∼1973). 1966년부터 태피스트리를 제작한 박래현은 손으로 뜨개질을 해서 만든 직조에 엽전, 커튼고리, 목재 등의 오브제를 연결하는 조형실험을 해낸다. 한국 공예계에 섬유예술이 자리잡기 이전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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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의 아내’란 그늘, 이젠 벗겨낼 때 박래현, 그이의 사정이 어떠했든, 당시 한국사회는 “옳다구나” 했더랬다. 재능 있는 화가에다가, 장애를 가진 남편에 헌신하고, 자녀 양육도 똑 부러지게 하고. 덕분에 박래현은 연애와 결혼, 신가정을 다루는 여성지의 단골 필진으로 불려다녔다는데. 그이의 이력에 독특한 화룡점정은 여기서 찍힌다. 1974년 미국유학에서 귀국한 그이에게 ‘신사임당상’을 쥐어준 일이다. 예술하는 현모양처, 바로 그거였다.
| 운보 김기창(왼쪽)과 우향 박래현. 1954년 4월 서울 화신백화점화랑에서 ‘제4회 김기창 박래현 부부전’을 열었을 때의 모습이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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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이루고, 또 벗어나려 했지만 여전히 남은 그림자. 그렇다고 평범치 않은 남편이 드리운 그늘을 벗겨낼 시간이 넉넉했던 것도 아니었다. 하던 일을 그대로 놔둔 채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야 했으니. 바쁘고 드라마틱한 쉰여섯 생을 멈춰 세운 건, 간암이었다.
처음은 그이를 모른 채 둘러보고, 다음은 그이를 읽은 뒤 둘러보고. 전시의 암묵적인 전제라면 ‘두 번쯤의 발걸음’이다. 코로나19가 기세를 잠시 멈춘 사이 미술관이 오프라인 개방을 했다. 미술관 누리집에서 예약하면 무료(덕수궁 입장료는 별도)로 만날 수 있다. 내년 1월 3일까지.
|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연 ‘박래현, 삼중통역자’ 전 전경. 한 관람객이 박래현의 ‘이른 아침’(1956)을 오래도록 지켜봤다. 오른쪽으로 ‘노점’(1956)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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