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진나면 책임질거냐"… 재건축 안전진단 시행에 주민들 '부글'

국토부, 5일부터 강화된 안전진단 기준 시행
데드라인 못 피한 목동 신기가지 등 불만 속출
소방활동·주차문제 평가비중 높였지만 실효성 없어
매매거래 뚝 끊어지고 시세 1억원 내린 매물 등장
  • 등록 2018-03-06 오전 6:00:00

    수정 2018-03-06 오전 8:06:05

△정부가 5일부터 강화된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시행하기로 하면서 재건축 추진 단지 주민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3일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열린 재건축 안전진단 강화 반대 집회 참가자들이 피켓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사진=양천발전연대]
[이데일리 김기덕 기자] 정부가 강화된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시행한 첫날 제도 적용이 불가피해진 아파트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다.

열흘간의 짧은 행정예고 기간에도 8000여건에 달하는 반대 민원이 대거 쏟아졌지만 국토교통부가 유예 없이 즉각 시행하는 초강수를 둔데다 일부 개선된 주거환경 평가 기준안도 정작 실효성이 없어 생색내기용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안전진단 데드라인’을 피하지 못한 서울 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를 비롯해 강동·송파구 일대 재건축 조합들은 지진이나 화재 등 안전 부문이나 주차난에 대한 개선안 손질 강도가 기존 약속과 다르다며 추가로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는가 하면 행정소송 등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땜질식 기준안 완화 “실효성 없어”

국토교통부는 5일부터 시행하는 강화된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에 추가로 주거환경 세부 평가 항목인 소방 활동 등 안전과 주차 문제의 점수 비중을 다소 높였다. 통상 20일이 걸리는 행정예고 기간이 열흘로 절반이나 줄어든 상황에서 재건축 단지 주민들이 집회나 항의 방문 등을 통해 반발 수위를 높이자 이를 다소 완화해 주기로 한 것이다.

계획안에 따르면 총 9개의 주거환경부문 평가 항목 중 소방활동, 세대당 주차대수 항목을 합한 가중치 비중은 기존 37%에서 50%로 높아진다. 또 세대당 주차대수 평가의 최저점 기준도 현행 40%에서 60% 미만으로 확대했다. 국토부 주택정비과 관계자는 “안전진단 평가 항목에서 구조안전성 가중치가 20%에서 50%로 높아지고, 주거환경 가중치가 40%에서 15%로 낮아졌지만 이와 별도로 주거환경 항목이 과락 수준인 E등급(20점 미만)을 받게 되면 다른 평가와 상관없이 재건축이 가능하다”며 “그동안 가장 민원이 많았던 분야가 소방 등 화재, 복잡한 주차 문제였기 때문에 (이를 감안해) 주거환경이 불량한 경우라면 사업이 진행될 수 있게 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제도 개선으로 실질적인 수혜를 받는 단지는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주거환경 세부 평가 항목에는 이번에 평가 비중이 높아진 ‘소방활동 용이성’과 ‘세대당 주차대수’ 외에도 층간소음, 일조, 도시미관, 에너지 효율성, 침수피해 가능성 등 나머지 7개 항목이 있다. 만약 소방활동과 주차 문제가 최하등급을 받더라도 나머지 평가 항목에서 점수가 높을 경우 E등급을 받기는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천발전시민연대(양천연대) 운영위원은 “이번 완화책은 반대 의견이 거세자 정부가 이를 잠시 무마하기 위해 일종의 땜질식 처방에 불과하다”며 “화재와 주차 부문이 최하인 0점이 나오더라도 나머지 부문에서 20점이 넘어 재건축을 불허하겠다는 의도는 누가 봐도 뻔한 결과다. 구조안정성 부문에서도 지반 조사 평가항목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는데 지진 후에 건물이 뒤틀리고 무너져야 사업을 허용할꺼냐”며 거세게 비판했다.

충분한 사전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정부의 행태를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강동구 재건축 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재건축 주민들의 의견 수렴 기간도 너무 짧았고, 불만 민원을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려면 단 5~10일이라도 유예기간을 둘 수 있는데 주민들 의견은 아예 묵살하고 있다”면서 “당초 국토부 고위급 관계자와의 면담에서 소방 안전과 주차 문제에서만 최하 점수를 받으면 재건축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약속을 받았는데, 실제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달라 당혹스럽다”고 말했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거래 침체에 급매물 나와… 시세 하락 불가피

강화된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이 본격 시행되면서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를 비롯해 노원구 상계동 주공아파트, 강동구 명일동 삼익그린2차, 송파구 아시아선수촌·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등 1000가구 이상 대단지 아파트들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들 단지는 안전진단 용역 체결을 위해 이미 지난달부터 서둘러 주민 동의서 징수, 구청 접수 등 사업 진행에 나섰지만 현지조사, 용역업체 선정 등에 한 달 가량의 시간이 걸려 계획대로 재건축을 추진하기가 사실상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양천구 목동 공인중개업소 관계자는 “지난달 안전진단 강화 발표 이후 시세 변화는 아직 없지만 매매 거래 자체가 뚝 끊어진 상황에서 확실히 매수자 우위로 시장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며 “불과 두 달 전만 해도 집주인이 부르는 높은 가격에도 매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시세보다 1억원 가량 떨어지면 연락달라는 매수 문의 전화만 걸려오고 있다”고 말했다.

송파구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는 지난달 초 전용 84㎡형 시세가 15억 5000만원이었지만 이달 들어 14억 5000만원으로 1억원 가량 떨어졌다. 인근 D공인 관계자는 “가격이 단기 급등한 데다 안전진단 강화 등으로 관망세가 짙어지고 있다”며 “일부 집주인들은 호가를 조금 더 낮춰서라도 팔 의향이 있어 시세는 조금 더 내려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양천연대를 비롯해 노원구, 강동구 등 서울의 주요 재건축 단지 주민들은 부산지역 단지들과도 의견을 교환해 ‘비강남권 죽이기 저지 범국민 대책본부’(가칭) 설립을 추진 중이다. 이들 연합 단체는 안전진단 기준의 효력을 무산시키기 위해 행정소송은 물론이고 사유 재산권 침해 등을 이유로 헌법소원도 제기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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