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올여름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는 소설가 김영하(45)도 한때 절필선언을 했다. 2011년 서른두 살이던 시나리오작가 최고은의 죽음이 발단이 됐다.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제자였던 최씨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굶어 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최씨의 죽음을 아사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난 언론·SNS와 정면충돌을 빚었다. 논란 끝에 그는 ‘블로그와 트위터에 글쓰기를 중단한다’고 표명했다. “최씨를 예술의 순교자로 만드는 것도, 아르바이트 하나도 안 한 무책임한 예술가로 만드는 것도 우리 모두가 지양해야 할 양극단이다.”
지난해 직업적 글쓰기를 중단한다고 선언한 작가 고종석(54)도 있다. ‘내 글쓰기가 무력해 보인다’가 이유였다. “언젠가 되돌아올 수도 있겠지만, 일단 접는다. 생계무책이기도 하다.” 말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백수생활을 하던 그가 1년여 만인 최근 ‘글쓰기 강좌’로 돌아오겠다고 밝혔다. 강좌내용을 책으로 내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글쟁이는 그만하겠지만 글에서 멀어지진 않겠다는 비책인 셈이다.
소설가가 소설을 멈추고 시인이 시를 쓰지 않기로 한다. 프로작가가 글쓰기를 멈춘다는 건 곧 생계수단을 내려놓겠다는 의미다. 원인과 동기는 제각각이다. 하지만 스스로 내린 그 ‘끝’만큼 절박한 것이 뭐가 있겠나. 더구나 감성이 칼끝 같은 그들이 그런 결정을 할 때에야. ‘오죽했으면’이란 심정적 동조가 뭉클뭉클 피어난다.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다시 돌아온 데도 이유가 있었다. 쓰지 않기로 다짐한 고통보다 쓰고 싶은 걸 참는 고통이 더 컸다는 얘기다. 다만 당황스러운 건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다. 돌아온 그들을 어떤 얼굴로 맞이해야 할지 표정관리가 안 된다. 일단 환영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게다. 그런데 뭔가 껄끄럽다. ‘잠정 중단’을 ‘절필’로 잘못 말하고 떠났던 게 아닌가 싶은 거다.
“오전에 깡마른 국화꽃 웃자란 눈썹을 가위로 잘랐다/ 오후에는 지난 여름 마루 끝에 다녀간 사슴벌레에게 엽서를 써서 보내고/ …/ 저녁이 부엌으로 사무치게 왔으나 불빛 죽이고 두어 가지 찬에다 밥을 먹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것 말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안도현 ‘일기’). 지난해 문인들이 뽑은 ‘2011년 최고의 시’. 이대로라면 시인에겐 ‘이것 말고’ 더 중요한 건 없어야 한다. 잃어버린 감각, 소통의 좌절, 탄압의 굴욕, 현실에 대한 분노 다 좋다. 하지만 절필 뒤에 숨기엔 뿌린 흔적이 너무 진하다. 붓을 꺾고 게다가 다시 붙여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인다. 아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