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끄덕끄덕]광장의 진화

  • 등록 2024-12-19 오전 5:00:00

    수정 2024-12-19 오전 5:00:00

[정덕현 문화평론가] “사랑해 널 이 느낌 이대로 그려왔던 헤매임의 끝. 이 세상 속에서 반복되는 슬픔 이젠 안녕” 거리에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가 울려 퍼졌다. 시민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응원봉을 흔들었다. 이건 콘서트나 축제의 현장이 아니다. 비상계엄 사태와 탄핵 정국에 거리로 나온 시민의 시위 현장이다. 아마도 소녀시대는 자신들의 노래가 시위 현장에 울려퍼질 줄은 몰랐을 것이다. 그것도 응원봉과 함께라니….

이번 시위가 펼쳐진 광장에서는 다양한 K팝이 울려 퍼졌다. 물론 여전히 ‘아침이슬’이나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1980년대 광장에서 울려 퍼졌던 민중가요들도 빠지지 않았지만 그 사이 사이를 에스파의 ‘슈퍼노바’나 로제의 ‘아파트’, 샤이니의 ‘링딩동’, 지드래곤의 ‘삐딱하게’, 방탄소년단의 ‘불타오르네’ 같은 K팝이 채웠다. 응원봉도 저마다 가지각색이었다. 특정 아티스트를 응원하던 응원봉이 시위 현장을 색색으로 물들였다. 과거 촛불 시위에서 똑같은 촛불들이 한자리에 모여 횃불이 된 풍경을 떠올려보면 색색의 응원봉과 발광 다이오드(LED) 촛불이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색깔은 시위문화에도 다양성을 추구하는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이 흥미로운 광장의 변화는 외신들도 주목했다. 로이터 통신은 ‘K팝 야광 응원봉이 한국의 탄핵 시위에서 불타오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응원봉이 ‘비폭력과 연대의 상징’으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 통신도 ‘K팝 응원봉이 한국의 시위 참가자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서울의 경관은 K팝과 정치가 결합한 화려한 디스플레이로 변했다”며 “K팝의 밝은 분위기가 정치적 혼란상을 가려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위 참가자들이 상황을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또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에서는 “엔터테인먼트 요소가 들어간 축제의 북적임을 보여주면서도 질서정연했다”며 “차세대형 민주주의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광장의 진화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진 걸까.

본래 광장은 시민의 것이었다. 민초가 모여 권력의 비리를 꼬집고 그 아픔을 토로하며 또 공감하던 공간은 다름 아닌 마당에서부터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독재 권력이 등장했던 1980년대에는 광장의 헤게모니 싸움이 치열했다. 신군부 쿠데타로 권력을 쥔 전두환 정권이 여의도에서 ‘국풍81’을 대대적으로 벌인 건 시민의 광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독재정권은 1987년 6월 광화문 광장으로 나온 시민에 의해 무너졌다. 최루탄이 터지고 전경들의 폭력적인 진압이 이뤄지던 당대의 광장의 풍경은 비장할 수밖에 없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이나 ‘광야에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같은 노래들이 당대의 광장에는 울려 퍼졌다.

그토록 비장했던 광장의 풍경이 2002년 월드컵 시즌에는 완전히 달라졌다.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운 ‘붉은 악마’의 물결은 과거 광장과 밀실의 시대가 지닌 트라우마를 밀어내는 듯한 상징으로 다가왔다. 레드 콤플렉스를 뛰어넘는 붉은 물결이 하나의 축제로 광장을 물들였기 때문이다. 그 광장에서 윤도현은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고 시민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우리 팀을 응원했다. 한목소리의 응원은 월드컵 4강 진출로 ‘꿈은 이루어진다’는 캐치프레이즈를 현실화했다. 시민이 한자리에 모인 축제의 광장이었다.

2016년 탄핵을 부르짖으며 광화문 광장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촛불을 들었다. 시국이 불러일으킨 진지함이 있었지만 이때의 광장 문화는 1987년의 그것도, 또 2002년의 그것도 아닌 새로운 것이었다. 마치 1987년과 2002년을 합쳐 놓은 듯한 광장의 풍경이랄까. 무려 190만 명이 운집했지만 분위기는 투쟁이 아니라 촛불이 상징하듯 차분한 공감과 기원에 가까웠다. 심지어 전경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시민의 성숙한 모습이 등장했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승환과 전인권 그리고 양희은 같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 와중에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는 한 여권 정치인의 발언은 아날로그 초가 LED 초로 바뀌는 계기가 됐다. 바람이 불어도 절대 꺼지지 않는 촛불이 등장한 것이다.

2024년의 광장은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진화해온 시위 문화가 또 한 차례 진화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것은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가치가 투영된 광장이었다. 민중가요와 더불어 K팝이 울려 퍼지게 됐다는 건 광장을 찾은 세대가 얼마나 다양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거기에는 1980년대 민주화 시대를 거친 세대도 있었지만 그걸 겪어보지 못한 20~30대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 세대를 대변하는 노래들이 다양하게 울려 퍼졌고 그들의 문화 또한 한자리에서 어우러지는 양상을 보였다. 민중가요나 민주화가 익숙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은 당대의 세대들을 이해하는 시간이 됐고 거꾸로 기성세대들은 요즘 세대들이 즐겨 듣는 K팝을 함께 흥얼거리며 그 팬덤 문화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광장의 시위 문화를 바꾼 중요한 요소 중 빼놓을 수 없는 건 ‘디지털 기술’이다. 시위 현장을 응원하기 위해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 현장 근처의 카페에 송금 결제를 통해 시민에게 커피를 나눠주는 기막힌 광경이 펼쳐졌다. 아티스트들은 응원봉을 들고 나온 팬들을 위해 핫팩을 주문해 보내기도 했고 직접 참여하기 어려운 시민은 후원금을 소액 결제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보태기도 했다. 아날로그의 광장 저편으로 디지털 광장이 겹쳐져 있는 새로운 풍경이었다.

민주주의를 위한 엄중한 메시지를 내면서도 동시에 보다 다양한 이들이 참여할 수 있는 축제 같은 경쾌함이 넘치는 광장. 10대부터 50대까지 그 문화가 공존하는 다양성을 담보하는 광장. 나아가 아날로그와 더불어 디지털이 함께하는 광장.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진화한 광장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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