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빚탕감 논란' 신뢰구축이 먼저다

  • 등록 2022-09-14 오전 6:15:00

    수정 2022-09-14 오전 9:11:12

[이철환 전 금융정보분석원장]최근 사회적 약자 보호 차원에서 채권자보다는 채무자 보호에 방점을 둔 여러 가지 금융지원 시책들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 7월 정부가 발표한 채무탕감 시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코로나 사태로 피해를 본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금융권 대출의 최대 90%까지 원금을 탕감해주는 채무조정 프로그램이다. 대책이 발표된 이후 성실히 채무를 이행하는 사람과의 형평에 어긋나고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우려가 크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면서 여론이 곱지 않은 게 사실이다.

채무조정교섭업의 신설, 채무자 대리인제도의 확대적용 등을 위한 각종 법의 제 개정 작업도 추진되고 있다. 채무조정교섭업이란 연체채무자가 자력으로 채무상환이 어렵다고 판단되는 경우 채권금융기관에 채무조정을 요청할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하고, 이 채무조정 교섭업무를 대행하는 영업행위를 뜻한다. 채무자 대리인제도를 활용하면 채권추심이 제한되는데, 기존에는 대부업체에만 적용되던 이 제도를 전 금융권으로 확대하려는 법개정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제도들이 실제로 가동하게 된다면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 현상 발생과 아울러 채권자의 재산권을 침해할 우려가 없지 않다. 이에 금융기관들은 크게 반발하고 있다. 일리가 있다. 취약계층의 어려움은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나눠야 하고, 그들을 도와주는 시책을 펴는 것은 당연한 국가의 책무다. 그러나 아무리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도 형평성의 원칙과 사회적 신뢰를 해쳐서는 곤란하다.

도덕적 해이란 법과 제도의 허점을 악용한 이익추구, 자기 책임을 소홀히 하는 태도, 집단이기주의 등의 현상을 의미한다. 도덕적 해이 현상이 광범위하게 확산될 경우 사회적 신뢰가 깨지게 된다. 오늘날의 사회를 흔히 ‘신용사회’라고 한다. 신용이 없으면 경제생활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회생활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는 얘기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용이란 신뢰관계에 근거해 형성되는 사회적 신뢰이며, 그에 따른 책임을 동반한다.

현대 경제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적 투입요소는 지식과 기술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기본적인 요소는 ‘사회적 신뢰’다. 이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은 국가는 경제사회 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고속도로나 통신망 등과 같은 물질적 인프라가 경제· 사회 활동의 효율성을 높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신뢰는 사회구성원 상호 간의 협력을 가능케해 경제사회 문제해결의 효율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신뢰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고 불린다.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사회는 기초가 부실한 건물과 같다. 신뢰의 부족으로 사회구성원들은 서로의 선의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기만 할 뿐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것이다.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사람들은 정부 발표나 전문가의 이야기보다도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이나 근거 없는 주장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로 인해 결국 경제를 포함한 국가 전체의 효율성과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금융은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비즈니스이다. 우리는 최근에도 고객의 정보가 대량 유출되는 사고, 8조 5000억 원 규모에 달하는 대규모 수상한 외환송금 사례 등 금융의 신뢰가 흔들리는 현상을 적지 않게 경험했다.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금융산업이 신뢰를 잃으면 금융거래 및 서비스가 위축되기 때문에 경제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는 경제 전체를 마비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두 차례의 금융위기를 통해 값비싼 비용을 치르며 교육 받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용사회가 원활하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자신과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사회구성원을 존중하는 자세, 사회전체의 이익을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선 사회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구축이 필요하다. 사회적 신뢰는 사회구성원이 사회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복잡한 사회적 갈등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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