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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결국 임기를 조기마감했다. 지난해 10월 말부터 이어온 숨 막히는 탄핵정국이 일단락된 것인가. 아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이제 곧 더 큰 소용돌이가 몰아칠 것이다. 바람은 멈춘 적이 없다. 그저 숨죽이고 있을 뿐.
다섯 달 남짓 숱한 인물이 세상의 입을 타고 오르락내리락했다. 혹시 그 시작점에 있던 사람을 기억하는가. 김병준(63) 국민대 교수다. 최순실게이트가 터지고 거국중립내각이 하나의 대안으로 수면에 떠올랐을 때 박 전 대통령은 그를 총리로 지명했다. 그후 그는 온통 마음고생뿐인 ‘절반의 총리직’을 얼마간 수행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세상에 모두 잊고 있던 김 교수를 기억해낸 건 최근 그가 낸 책 한 권 때문이다. ‘대통령 권력’(지식중심)이다. 대통령의 권력? 대통령의 권력이라니. 누구나 특별한 상상력을 발동케 할 제목이 아닌가.
김 교수는 지난해 말 아무나 겪을 수 없는 특별한 일을 ‘치렀다’. 쇳덩이처럼 달아오른 정국에 기꺼이 활화산이 됐던 일 말이다. 권력을 잃고 표류하는 대통령의 배에 탑승해 38일간을 총리후보자로 살았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9일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면서 그는 쓸쓸히 퇴장했다. 이후 특검 정국. 세상은 정신없이 돌아갔고 그 와중에 ‘대통령 권력’을 출간했다. 이제는 그 대통령도 없다.
△“어느 대통령이나 사연은 있어”
그런데 돌이켜보면 출간시점이 좋지 않았다. “쓴 지는 꽤 됐는데 그만 출판시기를 놓쳤다. 지난해 11월 초 총리로 지명받던 그즈음에 계획했는데 갑자기 일이 터지는 바람에 멈추게 됐다.”
아직도 노 전 대통령을 잊지 못하는 건가. “새삼스럽게 의도한 것이 있느냐”고 다소 저돌적으로 물었다. “어느 대통령이나 사연은 있게 돼 있다. 결국 그 사연이 호감을 주느냐 아니냐의 문제일 뿐. 노 전 대통령은 유독 특수성이 많았다. 그러니 할 말이 더 많을 수밖에.”
△대한민국 국가운영체제는 ‘고장난 자동차’
그렇다고 주의·주장을 쏟아부은 건 아니다. 차라리 회고록인가. 김 교수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학자로서 관찰자로서 할 수 있는 얘기를 끌어낸 것뿐이다. 행정학·경제학 이론으로 본 정보왜곡이나 인사 문제 같은 것을 풀어냈다. 회고록이었다면 내용이 달랐을 거다.” 궁극적으론 조직에서 힘의 논리를 알고 싶어하는 이들, 조직의 본질을 알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결국 ‘권력은 잿빛’이란 얘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젠 과거의 일이 된 박근혜 정권에 관한 지적도 몇몇 박혀 있다. 가장 눈길을 끈 대목은 국가운영체제를 ‘고장난 자동차’에 비유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런 식이라면 국회도 안 되고 관료행정도 안 되고 대통령도 안 된다”는 거다. 그렇다면 대안이 뭔가. 김 교수는 “고장난 자동차는 고쳐야 하는 거 아니냐”며 옅은 미소를 내보였다. “구조를 바꿔야 한다. 시장과 국가, 공동체가 할 일을 나눠야 한다. 국가가 정작 있어야 할 자리에는 없고 없어도 되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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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를 향한 아쉬움은 이내 대통령으로 향했다. “대통령은 인사를 좌우한다. 사람을 살리고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국가를 개혁하고 자본시장을 키우고 노동시장을 바꾸고 교육체계를 바꿀 힘이 없다. 대통령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 아닌가.”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건가. “다들 국회를 없애야 한다고들 하지만 난 반대다. 책임을 지는 구조로 가면 된다. 바로 내각제다.” 내각제는 김 교수가 늘 주장해오던 것이다. “내각제가 되면 대통령의 고민을 국회가 가져가는 거니까. 그렇게 하면 국회의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고 국가는 훨씬 나아지지 않겠나.”
△“권력은 고통…아차 하면 다 타버려”
요즘 우리에겐 그간 크게 의심하지 않았던 질문거리가 생겼다. 도대체 대통령이 뭔가. 권력은 뭐고. 그래서 물었다. “뭡니까 그게?” 그 지점에서 김 교수는 자못 비장해졌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나서지 말아야 하는 것이 대통령이다. 살겠다고 대통령을 한다면 결국 죽는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만큼의 비전과 가치를 내놓으란 뜻이다.”
대놓고 언급은 안 했지만 그의 행간이 읽혔다. ‘지금 아무나 막 나서고 있다’는 질책이다. “권력이 좋은 거라고? 모든 걸 다 이루니까? 천만에. 권력은 고통스러운 거다. 주변은 따뜻할지 모르나 불덩이가 들어 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다 타버릴 수 있다.”
특히 한국사회가 그렇단다. “경제력으로 세계가 재편되면서 국가의 역할이 줄어들고 시장의 힘이 커졌다. 그러면 국가는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이 김 교수의 생각이다. ‘약해진 힘’으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괜히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말고. “대한민국의 문제는 시골면장이 할 일도 대통령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칠 수밖에 없고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
△朴 “야당이 거국내각 구성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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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늦가을밤의 꿈이었다. 김 교수는 당시의 아쉬움을 아직도 품고 있다. 총리를 못해서가 아니다. 내각제가 깨져버려서다. “정말 필요했다. 거국내각을 거치지 않고서 한국정치는 동력을 확보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어차피 당시 남은 대통령 임기는 1년 3개월. 많은 일을 못할 거란 걸 알았다. 노동시장과 인력양성 문제 등을 거국내각의 총리가 압박해 국회로부터 답을 받고 싶었다.”
어떤 사안을 해결하자는 건 아니었던 듯하다. 일단 담론수준이 높아질 걸 기대했나 보다. 거국내각 총리를 전제로 협치를 시험하고 다룰 문제를 명확히 한다면 다음 정부는 훨씬 더 나아질 거라고 확신했단다.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거란 생각은 못했단다. 그저 대통령이 맥을 못 출 정도일 거라고. “내가 거국내각으로 치고 들어가면 문제는 가라앉지 않을까 싶었다. 총리에게 맡기고 떠난다는 말을 대통령이 했더라면. 문제가 거기서부터 꼬인 것 같다.”
덕분에 “당신이 보수냐 진보냐, 왜 박근혜 정부를 도와주느냐”는 질문은 숱하게 받았다고 했다. 수도 없이 말리는 이들에게 해줄 말은 난 그들의 편도 박근혜의 편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어떤 가치가 있느냐를 물었다면 달리 생각했을 거다. 왜 박근혜 정부의 편에 서느냐고 몰아붙이는 데 거부감이 들었다.”
△대통령직 연민…그래도 혁명을 꿈꿔
어느덧 대선구도의 한가운데에 들어섰다. 다음 정권에 바라는 것이 있을까. “과거의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설계가 바탕이 됐으면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보다 어떤 비전을 가진 지도자가 나오는가가 중요하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은 한국에서 정치를 못한다고도 했다. “희망은 만드는 거다.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 끈을 놓으면 안 된다. 대통령직이 어떤 건지 감이 있다. 대통령의 ‘결정’은 쉽지 않다. 그들의 고통과 애로를 안다. 외로움과 연민의 감정도 있다.”
국가 전체를 휘감았던 폭풍이 일단 지나갔다. 그 끝에서 우린 다시 5월의 새 대통령을 기다린다. “대통령을 탄핵하는 정도로 끝낼 일이 아니다”라고 했던 김 교수의 생각도 7부 능선을 넘은 셈. “잘못된 대통령을 만들고 잘못된 정당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잘못된 정치와 잘못된 국가운영체계를 탄핵하는 혁명을 꿈꾼다”던 그의 바람은 종국에 실현될 건가. 어찌됐든 그가 그토록 바라던 내각제는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한동안 다시 사라지게 됐다.
△김병준 교수는…
국민대 재직시절부터 한국학계에선 낯설었던 지방분권을 설파했는데 이런 소신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오랜 만남으로 이어졌다. 1993년 노 전 대통령이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특강을 계기로, 2002년 대선 때 노무현대통령후보 정책자문단장을 맡았고, 취임 이후엔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장, 청와대 정책실장 등을 지내며 행정·규제개혁을 실행했다. 이후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 대통령 정책특별보좌관 등 참여정부의 핵심에서 활약했다.
2016년 11월에는 박근혜 정부의 새 내각 총리로 지명된 후 국회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될 때까지 38일간 총리후보자를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