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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김용운 기자] 유럽 문명이 찬란하게 꽃을 피운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함께 르네상스 3대 천재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미켈란젤로 보오나로티(1475~1564)는 1508년 교황이던 율리우스 2세로부터 명령을 받는다. 로마 바티칸 내 교황이 일상적으로 미사를 드리는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라는 것이었다. 당시 교황은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최고 권력자였기에 거부할 수 없었다.
조각가로 명성을 얻었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전공이 아닌 천장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높이 20m, 길이 41.2m, 폭 13.2m.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예수의 제자인 12사도의 모습을 그려넣기를 바랐지만 미켈란젤로는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바탕으로 ‘빛의 창조’부터 ‘술 취한 노아’까지 주제를 9개로 나눴다. 하지만 천장에 그림을 그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쓴 ‘소네트’를 통해 천장화 그리기의 고통을 털어놨다. “턱수염은 하늘을 향해 있고 목덜미는 등에 닿아 있네. 나는 하르피아처럼 가슴을 구부린다네. 그런데도 위에서는 물감이 계속 흘러내려 내 얼굴은 물감 범벅이 되고 만다네.”
◇르네상스 예술의 정수 보여준 천재 ‘미켈란젤로’
이데일리·MBC가 공동주최하고 본다빈치·KR아트컴퍼니가 주관하는 ‘미켈란젤로’ 전이 서울 용산구 용산동 전쟁기념관 기획전시실에서 20일 개막하고 본격적인 관람객 맞이에 들어갔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부흥지던 피렌체 인근 카렌티노의 카프레세라는 마을에서 1475년 3월 6일 태어났다.
미켈란젤로가 유년기를 보낸 지역은 이탈리아에서 대리석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토스카나.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석공의 딸이던 유모의 손에 의해 자란 미켈란젤로는 덕분에 어렸을 때부터 조각에 관심을 보였고 14세 무렵 피렌체에서 유명한 조각가였던 조반니 베르톨로가 지도하는 젊은 예술가학교에 입학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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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전스아트로 확인하는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미켈란젤로’ 전에서 ‘피에타’와 ‘다비드상’은 이탈리아 전문가들의 진품을 그대로 묘사한 레플리카 작품으로 선보인다. 전시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미켈란젤로의 조각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와 벽화 ‘최후의 심판’이다. 사실 ‘천지창조’는 천장에 그린 작품이기 때문에 시스티나성당에 직접 가서 관람한다 해도 그림의 세세한 면까지 들여다볼 순 없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HD급 고화질 프로젝터 10대를 활용해 재창조한 ‘천지창조’다. 전시장의 천장과 벽에 작품들을 투사를 했는데 시스티나성당에서 고개를 쳐들거나 멀찌감치 떨어져 봐야 했던 그림을 전시장에선 선명한 색감과 또렷한 화면으로 자세히 감상할 수 있다. 아울러 3면에 걸쳐 대형스크린에 구현한 ‘최후의 심판’도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진품에서처럼 미켈란젤로의 숨결을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16세기의 예술작품을 최첨단 영상기술의 힘을 빌려 새롭게 되살렸다는 점에서 가장 21세기적인 전시회라고도 할 수 있다.
전시장은 이들 작품 외에도 미켈란젤로가 고안한 원기둥이라든가 피렌체에 있던 미켈란젤로의 작업실 등을 재현한 공간 등을 통해 생전의 미켈란젤로를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전시를 주관한 김려원 본다빈치 대표는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성당의 천장화인 ‘천지창조’를 4년간 홀로 그리면서 자신의 한계와 싸워 이겼다”며 “예술에 대한 열정과 노력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한 미켈란젤로의 생애와 그의 작품을 보다 쉽고 편하게 감상할 수 있도록 전시를 준비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3일까지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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