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길고양이와 공존실험 '함께 살애오'

광복관 인근서 길고양이 출몰에 퇴치 공고 붙어
"면학 분위기 저해"vs"길고양이 배려해야" 마찰
"사비·후원금 털어 고양이 쉼터·급식소 만들려"
  • 등록 2016-07-31 오전 8:41:47

    수정 2016-07-31 오전 9:45:17

지난 19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길고양이 ‘카모’가 놀고 있다. 카모는‘광복관 고양이 조용히할개오(광복관고양이)’가 학생들로부터 공모를 받아 지은 이름으로, 삼색에 코 옆의 까만 점이 특징이다. 카모의 목에 앞면엔 ‘광복관냥이’ 뒷면엔 ‘연세대의 소중한 구성원입니다 :D’고 적힌 인식표가 보인다. 앞서 광복관고양이는 카모에게 ‘포획-중성화수술-방사’(TNR·Trap-Neuter-Return)를 실시했다. (사진=최예원씨 제공)
[이데일리 유현욱 기자] “이 괭이 새끼 더럽게 시끄럽네…조용히 안 해!” 한 사내가 인정사정 없이 나에게 발길질을 했다. 나는 저항 한 번 못하고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주위는 어두컴컴했고, 나를 도와줄 ‘집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무서웠다. 발에 채인 허리가 쿡쿡 쑤셨지만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났다. 사내에게서 벗어나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배고픔이 몰려왔다. 길가에 버려진 빵 조각이 보였다. 덥썩 베어물었다. 서너시간이 흘렀나, 배가 아파왔다. 세상에 나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이름도 집도 없는 떠돌이, 나는 연세대 광복관 길고양이다.

페이스북 페이지 ‘광복관 고양이 조용히할개오’의 커버사진 갈무리. 27일 기준 621명이 이 페이지에 ‘좋아요’를 눌렀다.
이런 길고양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민 학생들이 있다. ‘광복관 고양이 조용히할개오(광복관고양이)’ 회원들이다. 광복관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의 강의가 열리는 건물로, 사법고시생과 로스쿨 학생이 학업에 매진하는 곳이다. 길고양이들에겐 안산을 타고 내려와 교내로 진입하는 길목이기도 하다. 1885년 연세대의 전신인 광혜원·연희전문학교가 문을 열기 전부터 사람과 야생 고양이가 영역 다툼을 해온 지점이다.

지난달 초 연세대 광복관에 붙은 이 건물 경비원이 쓴 대자보. ‘길고양이의 배설물과 울음소리가 면학분위기에 지장을 준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진=최예원씨 제공)
이런 굴곡진 역사가 지난달 초 반복됐다. 광복관 경비원은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는 일부 학생들을 겨냥해 “고양이의 배설물과 울음소리가 면학 분위기에 지장을 주고 있다. 사료를 치우지 않으면 학장에 보고 후 강제로 치우겠다”고 공지문을 내걸었다. 배후세력으로 기말고사를 목전에 둔 일부 로스쿨생이 지목됐다. 사법시험 2차를 앞둔 일부 고시생도 힘을 보탰다고 한다.

학교에서 쫓겨날 처지의 고양이들을 지키기 위해 최예원(25·여·연세대4)씨는 페이스북에 광복관고양이 페이지를 만들었다.

나이도 전공도 다른 대학생·대학원생들이 학내에서 고양이를 쫓아내기 보다는 사람과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뭉쳤다. 광복관고양이에 따르면, 교내에 확인된 고양이는 20여 마리다. 절반 이상이 새끼 고양이로 파악됐다. 광복관고양이는 ‘포획-중성화수술-방사’(TNR·Trap-Neuter-Return)를 제안했다. 중성화수술을 통해 길고양이의 개체 수를 조절할 수 있으며 발정기 울음 소리 예방에도 효과적이다.

새끼 고양이가 생후 7개월이 되면 TNR을 실시해 고양이 개체 수를 관리키로 했다. 중성화수술이 끝나면 고양이는 울음소리도 줄어들 전망이다.

일부 성묘(成猫)는 포획해 중성화수술을 실시한 뒤 방사했다. 동물병원의 도움을 받아 방사한 고양이에게 앞면엔 ‘광복관냥이’ 뒷면엔 ‘연세대의 소중한 구성원입니다 :D’라고 적힌 인식표를 달아줬다. 아울러 ‘버티’ ‘카모’와 같이 학생들로부터 공모를 받아 선정된 이름을 붙여줬다.

페이스북 페이지 ‘광복관 고양이 조용히할개요’의 대표 최예원(25·여·연세대4)씨. 최씨는 페이지를 만든 다음날 ‘나는 갑자기 교내 고양이 운동가가 되버렸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다.(사진=최예원씨 제공)
최씨 등은 사비와 후원금 100만원으로 한경관 근처·삼성관 옆길·윤동주 시비 옆 등 고양이가 자주 출몰하는 7개 구역에 고양이 쉼터·급식소 만들 계획이다. 이를 위해 광복관고양이는 연세대 시설처·총학생회와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이들은 먹이를 구하지 못해 영양 상태가 부실하거나 사람이 먹는 조리된 음식을 먹어 탈이 난 길고양이에게 구급 조치를 했다. 험로에 빠지거나 담벼락에 낀 새끼 길고양이를 구조하기도 했다.

광복관고양이는 느슨한 공동체를 넘어 동아리 ‘함께 살애오’(가칭)를 만들기 위해 분주하다. “개인적으로 길고양이를 돌봐온 학생은 많았으나 이렇게 모여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처음”이라고 최씨는 설명했다.

최씨에게는 주변에 말 못한 비밀이 하나 있다. 사실 최씨는 수년 째 반려견을 키우고 있는 ‘애견(愛犬)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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