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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기자] “나는 1931년 식민지 시대에, 오백년 왕조시대의 수공업과 농경문화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산골 벽촌에서 태어났다.”
마치 선언 같은 자전적 고백을 단 박완서(1931∼2011) 작가의 마지막 산문집 ‘세상에 예쁜 것’(288쪽, 마음산책)이 출간됐다. 유고집이다. 이태 전 나온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가 작가의 산문집으로선 끝인 줄 알았다. 삶의 애환과 고적함으로 버무린 작가 특유의 글 뭉치가 주는 울림에 그만 만족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기대치 않은 덤이 생겼다.
제목으로 뽑은 ‘세상에 예쁜 것’은 생전에 절친했던 화가 김점선의 병상모습이다. 2009년 김점선이 세상을 뜨기 엿새 전이던 그날 작가는 그의 어린 손주가 병실에서 잠든 걸 보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이내 수명 다한 고목나무가 자신의 뿌리 근처에서 몽실몽실 돋는 새싹을 볼 수 있다면 고목나무는 쓰러지면서도 얼마나 행복할까, 마음을 바꾼다. 잠시나마 자신의 생각이 옳지 않았음을 탓했다.
법정스님과의 인연을 쓴 마지막 글도 실렸다. 깊은 산속 옹달샘에 비유한 스님이 자기만 더럽혀지지 않으면 그만이라 생각한 이기적 존재는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함부로 오염시켜도 강이 죽지 않고 살아갈 가망이 있는 건 어디선가 졸졸 흘러드는 맑은 물이 강의 임계점을 지켜주기 때문 아니냐고 묻는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유언으로 가름한다. “어느 나라 어느 사회나 어디엔가 높은 정신이 살아 있어야 그 사회가 살아 있는 것과 다름없는 이치라고 생각한다.”
“원고를 정리하며 눈물을 쏟았던 구절처럼 이제 어머니는 정말 멀고 신비한 곳에서 특별한 바람을 보내주시는 것 같다.” 원숙 씨의 애절한 사모가가 후기로 대신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