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동경이 있기 마련이다. 가지 않은 길은 익숙함과의 이별이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하는 순간이다. 그러나 가지 않은 길이 탄탄대로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온갖 험로와 위험이 도사릴 수도 있다.
미국민들은 ‘가지 않은 길’로 발을 내딛었다. 미국 유권자들은 온갖 기행과 막말로 비웃음을 샀던 극단적 아웃사이더 도널드 트럼프를 새 대통령으로 뽑았다. 마치 막장 드라마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영국이 유럽연합(EU)체제에서 벗어나려는 브렉시트의 데자뷔(이미 본 듯한 느낌)를 보는 듯 하다.
트럼프의 등장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미국 유권자의 분노를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미국 작자 존 스타인벡이 쓴 소설 ‘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처럼 미국 정치현실에 불만을 품은 유권자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지가 휘도록 무르익어 갔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증오는 진실과 이성의 눈을 가린다.
분노를 먹고 살면서 이를 부추기는 생태계 중심에는 트럼프가 자리잡고 있다. 이제 전 세계는 자신의 잘못을 남 탓으로 돌리는 광대의 화려한 굿판을 지켜보는 처지가 됐다. 불만의 원인을 밖으로 돌려 위험을 차단하고 국민 결속을 강조해 반대자를 억압하는 것은 나치즘과 파시즘의 공통된 속성이라는 점을 그가 알고 있는 지 모르겠다.
사실 이번 대선을 앞두고 전세계는 트럼프의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에 대한 집단이성의 표출을 기대했다. 영국 인지·심리학자 피터 웨이슨이 처음 선보인 확증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다른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뜻한다. 다민족 사회인 미국의 현실을 도외시한 채 정치와 경제 문제를 인종과 문화의 충돌로만 여기는 트럼프의 터널 비전(tunnel vision)을 꼬집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도발적인 언행에 쾌감을 느끼며 아낌없이 표를 안겨준 미국 백인사회의 어두운 단면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트럼프가 이쓰는 미국의 신(新)고립주의는 자국 이기주의의 구차한 명분을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거짓순수’(pseudoinnocence)다. 인공지능(AI)과 로봇, 사물인터넷(IoT)이 경제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바꾸는 제4차산업혁명 시대에 국경을 걸어 잠그고 보호무역주의 깃발을 내걸은 그의 모습은 시대를 거꾸로 거슬러 가는 퇴행적 행태다.
<글로벌마켓부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