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386. 대한민국에서 이만큼 상징성을 가진 숫자도 없다. 세 가지 조합이라면 대개는 거대한 사건·사고와 연결된 게 전부였으니. 815·625·419·518처럼 말이다. 지나버린 시간을 가둔 박제가 아니어서 더욱 그랬을 거다. 최소한 386은 현대사의 격한 민주화 흐름을 주도한 주체에게 부여한 ‘민증번호’였으니까. 1960년대 태어나 1980년대 대학을 다닌 30대. 여기에 한 번도 주역인 적 없는 ‘세대’란 타이틀까지 살려낸 ‘386세대’는 그 자체로 변화고 혁신이었다. 이들을 앞세워 X세대, 밀레니얼세대, Z세대 등이 태어난 것 아닌가.
그런데 요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 386세대가 정조준을 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사회의 온갖 문제를 양산한 주범으로 몰린 처지가 된 거다. 1987년 민주화 항쟁을 성공시키며 얻어낸 전리품으로 30년을 장기집권하더니 결국 ‘불평등 생산자’ ‘헬조선 제조자’가 됐다는 비판이고 비난이다. 최근 연달아 출간한 두 권의 책이 그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하나는 이철승(48) 서강대 교수가 쓴 ‘불평등의 세대’, 다른 하나는 기자 김정훈(41), 연구자 심나리(38), 정치권 종사자 김항기(31)가 공동저자로 나선 ‘386 세대유감’. 굳이 나이들을 밝힌 건 연령층을 따지지 않는 ‘폭넓은(?) 비판층’을 가졌다는 특징을 내보이기 위해서다.
386세대를 새삼 화두로 꺼낸 시작점은 올초 이 교수가 학술지에 발표한 논문 ‘세대·계급·위계: 386세대의 집권과 불평등의 확대’다. 책 ‘불평등의 세대’는 논문을 축으로 살을 붙인 단행본 판쯤 된다. 뒤이은 ‘386 세대유감’은 이 교수의 논쟁에 불꽃을 튕긴 동시에 앞으로 한국사회가 한동안 타고 갈 ‘386세대론’의 예고편이 될 참이다.
다만 온도차는 있다. ‘불평등의 세대’는 한국사회에서 386세대가 정치·시장권력을 독점한 과정, 그로 인해 사회불평등을 야기·고착화해왔다는 점을 치밀한 데이터분석으로 파낸다. ‘386 세대유감’은 정치·경제·교육·문화·사회 모든 분야에서 386세대가 다진 ‘공’, 눈감아버린 ‘과’를 헤집으며 헬조선 탄생에 주동·가담·방관해온 미필적고의를 따진다. 한쪽이 이성적으로 조근조근 지적하는 식이라면 다른 한쪽은 감성적으로 시끌벅적하게 추궁하는 식이라고 할까.
이 교수의 시선이 특별한 건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개념 ‘불평등과 계급’을 ‘세대’란 앵글에 비춰냈다는 점이다. 사실 계급은 사회층위의 불평등을 나타내는 가장 고전적인 단위였다. 그래서 이제껏 ‘자본가와 노동자 간 불평등이 갈수록 커진다’는 말에 별로 토를 달지 못했던 것 아닌가. 그런데 이 교수가 그 분명한 프레임을 ‘세대’로 교체해버린 거다. 이는 계급을 넘어선 새로운 강적이 나타났다는 뜻도 되고, 그렇게 읽어야 할 징후가 뚜렷해졌다는 뜻도 된다.
“386세대의 성공담을 들으며 20∼30대를 보냈다.” ‘386 세대유감’의 목소리는 이 첫 문장부터다. 20대에 민주화운동을 이끌고, 그 후광으로 30대에 정계진출, 외환위기의 파고 덕에 윗세대가 빠져준 직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확보, 40대에 고임금·부동산으로 빠르게 중산층에 진입했으며, 50대에 자신들만의 끈끈한 네트워크로 대한민국을 평정한 그 세월을 단 한 문장에 녹여낸 거다. 입시·취업·주거까지 때맞춰 딱딱 당첨되는 ‘로또세대’. 하지만 결국 그들을 키운 대부분이, 노력이 아닌 ‘시대’란 게 드러나고 말았다고 했다.
△혁명 지원군의 ‘두 번째 희생’
비록 방법론은 다르지만 두 책은 자주 겹친다. 일단 출발점이 같다. ‘좋은 운을 타고 난’ ‘축복받은 세대’가 왜 이리 망가졌느냐는 것. 과정도 일치한다. 장기독점해온 386세대의 권력이 다음 세대의 길을 막아섰다는 것. 마무리도 다르지 않다. 잘 키우기는커녕 가혹한 운명으로 내몬 ‘3포 세대’ ‘88만원 세대’ 등에 책임을 지라는 것.
다만 해결책에선 갈림길을 낸다. ‘불평등의 세대’는 386세대 스스로가 가진 것을 내놓아야 한다는 쪽으로 실타래를 푼다. 임금피크제 도입과 호봉제 약화, 청년세대의 고용확대와 주거권 개선, 연금구조를 바꾸는 일 등에 사회적 합의를 이루라고 했다. 이런 ‘나눔전략’이야말로 예전 민주화 투쟁에 이어 역사가 기록할 ‘두 번째 희생’이 될 거라고.
‘386 세대유감’의 결론은 이렇다. “평등하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세상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니, 그것이 혁명의 완결이라면 이제라도 염치와 배려의 미덕을 풍기는 혁명의 지원군이 돼 달라.” 여기에 게임체인저는 이제 특정 세대가 주도해선 안 된다고, 세대 간 팀플레이여야 한다고까지.
아마 억울한 ‘386’도 있으리라. 싸잡아 몰아붙이는 행태가 거슬릴 수도 있겠고. 386은 명예기도 했지만 멍에기도 했으니. 하지만 무엇이 됐든 ‘기성세대의 처신’이란 점에서 딱히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싸움을 걸기보단 차라리 성찰의 기회로 삼는 게 현명한 대처가 될 거란 얘기다. 맹자가 그랬다지 않나. “성문 앞 수레바퀴 자국이 어떻게 말 두 마리 힘으로 만들어진 것이란 말인가.” 바퀴자국은 공적이기도 하지만 해악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