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인 2001년 종로구 평창동에 문을 연 김달진미술연구소가 시작이었다. 연구소로 커버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자 7년 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까지 열었다. 국내 최초 미술자료 전문 박물관. 하지만 이름뿐이었다.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한 사투는 온전히 그만의 몫이었다. 옛 자료로 생색만 낸 게 아니었다. 수시로 인사동·사간동은 물론 전국을 이 잡듯 뒤지고 다니며 미술자료를 거둬들였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는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출간된 단행본, 정기간행물, 학회지, 논문, 도록, 팸플릿, 신문기사스크랩과 함께 국내 근현대작가자료가 축적된 파일 등 6만여점 18톤 분량. 그런 그에게 갈수록 커지는 고통이 있었으니 보관문제였다. 이삿짐센터 ‘기피 1순위’라는 책과 종이로만 짐을 꾸려 옮겨 다닌 것도 몇 차례. 통의동, 창성동, 창전동을 전전하며 전·월세 생활을 이어갔다.
그의 수집벽은 45년을 거슬러 오른다. 고교시절 여성지에 간간이 등장했던 세계명화를 오려 모은 것부터란다. 미술에 눈을 돌린 건 1972년 국립현대미술관서 열린 ‘한국현대미술 60년’ 전을 관람한 이후. “인생의 전환점인 대사건”이었다고 회고한다.
김 관장이 그의 자료 속에서 주역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학맥으로 무장한 미술계는 물론 그간의 심혈을 ‘개인기’로 취급한 관이 그를 철저히 배타적 영역 밖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1952년 전쟁통에 덕수궁미술관에서 외국작품전이 열렸다. 이 사실을 어찌 알았겠는가. 기사와 도록 덕이다. 이것이 자료의 힘이다.” 기본과 기초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품격있는’ 시대가 찾아와 이 가치의 힘을 어서 품어주길 바랄 뿐. 김 관장의 후반전 승부수는 ‘디지털’이란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다 하는 디지털이 그에겐 남은 생을 전부 걸 목표가 됐다. 염치가 있다면 “그간 고생했으니 앞으로 45년 그냥 더 가봅시다”라곤 할 수 없을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