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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정갈한 매무새에 대쪽같은 심성을 기억한다면 반은 건진 거다. 그 외형이 ‘무소유’에서 비롯됐다고 여긴다면 나머지 반을 챙긴 거다. 무소유, 그건 아무것도 갖지 않겠다는 의지니까. 뺏긴 게 아니라 스스로 내놓는 거니까. 한 승려의 성찰로 산문집 표제에 나섰던 그것이 내 인생의 갈림길에 해결해야 할 과업이 됐다. 법정스님(1932∼2010), 그가 참 깊이도 박아둔 숙제 말이다. 가질 건가 버릴 건가, 우린 늘 그게 문제인 거다.
2010년 3월 초순. 말이 봄이지 뼛속에 남은 찬 기운이 욱신거리던 그날 스님이 입적했다. 참 대단한 무소유였다. “장례식 하지 마라. 수의도 필요 없다. 입던 옷 그대로 평상에 올려 다비하라. 사리도 찾지 마라.” 전날 밤 유언처럼 남겼다는 그 말은 두고두고 회자됐다.
그 토막말뿐이겠나.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기가 막힌 문장을 술술 뽑아내는 수필가였다. ‘무소유’에 이어 ‘말과 침묵’ ‘산방한담’ ‘텅민 충만’ ‘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 ‘아름다운 마무리’ 등. 내놓는 족족 판매순위를 갈아치우며 척박한 중생의 영혼에는 위로를, 출판계 영업실적에는 단비를 내렸다. 날카로운 자극을 다 빼버리고 선한 문구로 사람의 가슴을 후벼파는, 그 기술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게 걱정이었나 보다. 덜컥 이렇게 당부한 게 아닌가.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부탁한다.” 혹여 그가 세상을 뜬 이후에 닥칠 ‘무소유 쟁탈전’을 염려한 듯 ‘출판금지령’을 선언한 것이다. 아니 ‘무소유’마저도 소유 말라는 경고였다.
그후 8년. 새 책이 나왔단다. 그것도 미발표원고를 챙긴 ‘법정 지음’의 신간이라니.
△강원 화전민 오두막에 남긴 ‘산거일기’
그간 한 번도 세상에 나온 적 없던 내용은 두 가지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갇힌 옥중에서 쓴 3편의 시 ‘어떤 몰지각자의 노래’ ‘쿨룩 쿨룩’ ‘1974년 인사말’이 하나. 다른 하나는 ‘임종게’다. 고승이 입적할 때 후인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 말이다. ‘출판금지령’이 마지막인 줄 알았는데, 책은 그간 차마 드러내지 못했던 ‘임종게’가 남아 있음을 조용히 알린다.
오대산 골짜기 화전민 오두막이자 스님의 마지막 거처였던 수류산방. 책에는 그 오두막을 시주했던 한 보살 부부의 인연이 배어 있다. 1992년부터 기거하던 그곳을 2008년 떠날 때 스님이 버린 상자에 들었던 ‘원고뭉치’를 이들 부부가 엮어낸 거다. 이들은 덕전·리경이란 필명으로 자신들을 소개하며, 원고뭉치와의 우연치 않은 첫 만남을 기억해냈다. ‘잠언집을 위한 집필 메모’라 적은 첫장에 ‘유서처럼 쓰고 유서처럼 읽기를 바라며’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고.
△“덜 갖고 더 많이 존재하라”
“스님, 임종게를 남기시지요.” 임종 직전의 법정스님에게 상좌스님이 물었단다. 가쁜숨에 섞인 한 마디씩 대답이 들려왔다. “분별하지 말라. 내가 살아온 것이 그것이니라. 간다, 봐라.” 법정스님의 임종게다.
‘분별하지 말라’는 그것이 무엇이든 가리지 말란 뜻이리라. 앞과 뒤, 높고 낮음, 길고 짧음을 재지도 따지지도 말란 얘기다. 둘은 원래 하나였으니까. 맞다. ‘내가 살아온 그것’은 항상 둘을 일치시키는 삶이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친 채찍은 늘 일상에서 나왔다.
“장작 팰 일과 군불 지필 일이 없다. 뭔가 빠져나가는 것 같다. 육체적인 활동이 줄어들수록 사람은 관념적인 인간이 되어간다.” “아궁이에 재치다. 수행이란 뭔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이다.” 그러곤 드디어 여기까지. “아무것도 없이 방석 한 장 깔다. 빈방, 보기에 좋다! 이 자체가 명상의 소재다.”
바로 만년필이었다. 고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그래, 탓하지 않았다. 기분이 안 난다고 했지 글이 안 써진다고는 하진 않았으니. 어쨌든 흥미로운 빈틈이 아닌가.
무소유만큼이나 스님이 강조한 게 있다. 공부다. 오죽했으면 “내가 가는 이 모습도 공부하라”고 했겠나. “깨달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일”이라고 굳게 믿고 실천했다.
△8년 만에 다시 보는 묵직한 행간
누군가 물었단다.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면 초목과 다를 게 없는데 무심이 뭡니까.” 그래서 이렇게 얘기해줬단다. “마음 자체가 없단 말이 아니고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음을 말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사례까지 붙여줬단다. ‘빈병’은 병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 거지 병 자체가 없다는 게 아니지 않느냐.
자신의 마지막 길에 충분히 작용했을 법한 탄식도 보인다. 일각스님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모양이다. “출가 수행자의 장례식이 이렇듯 거창하고 번거롭게 치러져야 하는가. 수행자의 장례가 5일이나 이어지는 것도 맞지 않고, 수백을 헤아리는 화환과 만장도 도리가 아니다.”
이뿐인가. 칼끝 같은 감성과 결합한 치열한 수행의 결과는 책장 여기저기서 번뜩인다. “말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는 말 대신 침묵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에 지키게 되는 침묵은 침묵이 아니다.” “나는 타인의 고통 앞에서는 두 가지 태도만이 바르다고 확신한다. 침묵하고 함께 있어주는 것. 고통받는 자들에게 충고하려 들지 말자” 등.
보이는 행이 이렇게 묵직하려면 보이지 않는 행간에는 얼마나 많은 추가 달려 있겠나. 토 달 것도 없고, 시비 걸 것도 없고, 닮아보겠다는 말은 감히 할 수도 없어 차라리 덜 고통스럽다. 스님의 글이 그렇고, 생애는 더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