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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달팽이처럼 돌돌 말린 문양이 여기저기서 번쩍한다. 나선을 따라 박아넣은 금박이 조명을 받아 눈이 부실 정도다. 한눈에 봐도 알 만한 그림. 독창적인 패턴과 강렬할 색채, 찬란한 황금빛을 뒤집어쓴 관능적인 여인이 등장했으니 말이다.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생명의 나무’(1909)가 분명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거대한 나무에, 금박에, 여인은 그대로인데 ‘관능’이 빠진 거다. 고대 이집트 벽화에서나 볼 법하다는 자태를 뽐내는 여인 대신 커다란 눈의 앳된 소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으니.
#2. 아미타불 본존이 결가부좌한 채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그 아래 좌우로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 두 협시보살이 본존을 보필하듯 서 있고. 뒷머리 쪽엔 광배가 둥글게 아우라처럼 뻗쳐 있는 모양이, 그림 한 폭에 삼존을 그린 전형적인 고려불화 ‘아미타삼존도’(14세기)가 맞다. 그런데 일본 도쿄 네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그림은 색까지 바래 얼굴조차 희미한 지경이라는데. 여기 이 그림은 역시 뭔가 이상하다. 예의 그 커다란 눈을 가진 세 여인이 한껏 치장을 하고 삼존을 흉내내듯 들어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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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전시장 벽마다 큼직한 액자 속 낯익은 그림들이 걸렸다. 지구촌 유수의 미술관에 있어야 할 굵직굵직한 간판작을 그대로 옮긴 듯하다고 할까. 마치 세계명화전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 전경. 그런데 어디까지나 멀찍이 떨어져 봤을 때의 얘기다.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예상치 못한 상황에 놓이는데. 그림마다 박혀 있는 바로 그 과장된 큰 눈과 마주치는 그 일이다.
△“유능하면 모방하고 위대하면 훔친다”
작가 마리킴(43)이 국내서 4년 만에 개인전을 열었다. 이름 하여 ‘마스터피스’ 전. 타이틀 그대로 전시는 명화로 시작해 명화로 끝난다. 다만 늘 봐오던 그것들과는 다른 모양인데. 작가의 독특한 캐릭터 ‘아이돌’(Eyedoll)을 명작 속 주인공(주로 여성) 자리에 과감하게 등장시킨 거다. 하나같이 ‘마리킴 아이돌’로 변신한, 그렇게 아이돌이 진격한 명화를 재구성한 작품은 26점. 회화 25점과 조각 1점을 걸고 세운 작가는 이 모두를 “원작에 대한 오마주”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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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을 변형했지만 작품명은 원작 그대로 삼았다. 시작은 ‘웨스턴 모텔’(1957/2019). 미국작가 에드워드 호퍼가 그린 그림이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프랑스작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송빌르 백작부인의 초상화’(1854/2019)가 보이고, 에두아르 마네의 ‘철도에서’(1873/2019),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물뿌리개를 든 소녀’(1876/2018)도 눈에 띈다.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고야가 옷을 벗기기도, 옷을 입히기도 했던 여인 마하를 그린 ‘옷을 벗은 마하’(1797∼1800/2019), ‘옷을 입은 마하’(1803/2019)는 세트로 걸려 있고, 디에고 벨리스케스의 그 유명한 ‘푸른 드레스를 입은 마르가리타 공주’(1659/2019)는 더 어려졌다.
이뿐인가. 이탈리아의 중세 걸작품도 나왔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흰 담비를 안은 여인’(1400s/2019), 산드로 보티첼리의 ‘이상적 여인의 초상’(1400s/2019) 등등. 물론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시공을 고려 후기로 옮겨놨으니. ‘수월관음도’ ‘아미타삼존도’ ‘관음·지장보살병립도’ 등이 불화시리즈(2019)로 나섰다고 할까. ‘수월관음도’에서 좌상으로 빼낸 조각작품(2019)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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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아이돌’은 이미 유명하다. 2007년 한국 미술시장이 호황을 누릴 때 팝아트의 줄기로 이름을 알렸다. 그 ‘만화 같은 그림’은 2011년 아이돌그룹 2NE1 앨범표지에 등장하면서 ‘아이돌과 손잡은 아이돌’로 한 차례 더 부상했다. 그런 작가가 처음부터 ‘아이돌’을 작정하고 탄생시킨 건 아니란다.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배운 적이 없다”는 작가는 “만화를 그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눈이 큰 캐릭터가 스타일이 됐다”고 말한다. 실제 작가는 미대에서 미술이 아닌, 공대에서 멀티미디어를 공부했단다. 컴퓨터로 애니메이션 그리는 일이 훨씬 익숙했다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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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주인가 훼손인가…보는 이가 가려야
그렇다면 왜 굳이 명화에 접목했을까. 미술작품은 단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편견에 어깃장을 놓고 싶었나 보다. “사진복제시대를 지나면서 ‘원화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명화에도 기술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전유물처럼 꺼내보고 소유하던 명화를 대중화하고자 했다는 거다. 고려불화는 한국적인 상황의 ‘대중화’인 셈. 좀처럼 눈에 잘 띄지 않는 그 ‘걸작들’을 누구나 볼 수 있게 노출한 셈이다.
하지만 의도와는 달리 작품은 극과 극의 평가에 놓일 만도 하다. ‘원작 오마주’인지 ‘원작 훼손인지’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말이다. 이를 의식한 듯 작가의 반응도 조심스럽다. “유능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피카소가 말하지 않았나. 하지만 난 그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명화의 색다른 방식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그 한 근거로 작가는 ‘흰 담비를 안은 여인’(2019) 속의 다빈치 사인을 가리킨다. 원작을 훼손하거나 훔치려 했다면 굳이 그 사인까지 옮겨놨겠느냐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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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말을 인용해 작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현대미술에서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아이디어를 내는 거니까.” 그 말대로 작품은 불멸의 예술성에 최신의 기술을 과감하게 얹은 상상력의 승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한다”(톨스토이)며 작가가 신봉해온 ‘미론’에선 호불호가 생길 만하다. 다른 손을 타야 아름다워지는 예술이란 점에서 반기가 들릴 여지가 충분하니까. 결국 반역인지 반전인지는 보는 이들이 가려내야 할 터. 어쨌든 미술계에 흥미로운 얘깃거리를 던져놨다고 할까. 전시는 3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