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위정자도 어쩌지 못한 쓰레기가 유럽 도시서 치워지는 데는 수백년이 걸렸다. 오물세를 거둬 거리 조명이라도 설치하자는 묘수는 1500년대 초반에 나왔다. ‘쓰레기통’이란 게 왕의 칙령으로 처음 만들어지는 데는 그로부터 60년이 더 걸렸다. 근대로 와선 쓰레기 소각이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1893년 파리 근처에 프랑스 최초의 소각장이 세워지면서다. 위생학자들은 불의 정화기능을 역설했고, 농학자들은 토양에서 나온 유기물의 보고를 태워 없애는 것에 격분했다.
쓰레기의 역사. 그런데 이 과정에서 쓰레기는 정말 쓰레기일 뿐인가. 아니다. 근현대로 옮겨오면서 쓰레기의 숨은 진가도 드러난다. 가령 이탈리아 환경마피아들에게 쓰레기는 사업이었다. 싼값에 공터를 사들여 처리장을 짓고 이탈리아 전체는 물론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국경을 넘은 쓰레기를 ‘관리’하기 시작한다. 이들 마피아기업과 결탁한 부패관료들, 또 이들의 부정행위가 개입한 경쟁입찰은 그간 간신히 구축해온 합법적인 쓰레기관리 체인을 단번에 무너뜨리기도 했다.
미덕도 있다. 미안한 얘기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쓰레기는 생계를 잇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동식물의 먹이와 더불어 에너지의 기본재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가끔은 아트가 된다. 예술성을 자극하는 영감이거나 좋은 소재로.
쓰레기로 쌓은 문명사. 책은 쓰레기에 관한 길고 지난한 기록이다. 이 작업을 위해 프랑스 농학자가 나섰다. 유기농, 생물량에너지, 쓰레기처리 분야 전문가다. 인간 삶의 흔적으로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쓰레기에 관한 총체적 고찰을 이뤄낸다. 사료를 뒤지고, 학문적으로 관찰하고, 정책과 행정의 타당성을 따져보고, 대중적 실천을 붙였다. 종국엔 쓰레기에 역할을 부여한다. 인간과 벌인 투쟁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공생연대로 미래를 도모할 파트너라는 데까지.
현대의 쓰레기에 대한 관심은 단연 ‘돈’과 연결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수거와 재활용, 폐기로 진행되는 단계들에서 벌어지는 이권 다툼이다. 마땅히 쓰레기줍기가 생존수단인 제3세계 국가들을 간과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면엔 조직원 2만여명을 거느린 멕시코 넝마주이 갱단도 버티고 있다. 쓰레기를 주워담았더니 자본주의의 악취가 풍기더란 얘기다.
그런데 ‘돈’은 쓰레기의 향을 바꾸는 일에도 쓰였다. 1800년대 중반부터 파리 패션의 한 축은 헌 옷 수집인이 담당하기도 했다. 그 여파인지 요즘 프랑스의 한 장관은 음료수캔과 통조림 포장용기로 만든 가방으로 멋을 낼 줄도 안단다. 인도 뉴델리산 재활용 쓰레기는 최고의 디자인을 걸치고 유럽 고급 부티크로 진출하기도 한다. 빈민들이 수거한 폴리에틸렌 봉투를 재가공한 패션상품이다.
▲“재활용은 만병통치약 아냐”
버리고 줍고 묻어왔다. 그랬더니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렇게 쓰레기는 인간의 해묵은 동반자가 됐다.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문제는 문명이 확장되면서부터 불거졌다. 과소비가 권장되며 버리는 게 많아지자 어느 순간부턴 압축성장과 더불어 분리수거, 쓰레기종량제가 인생의 키워드로 떠올랐다.
엄밀히 말해 저자는 인류의 거창한 미래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단지 쓰레기가 만드는 미래엔 각을 세운다. 그렇다면 저자가 쓰레기와 도모한 미래의 그림은 어떤 건가. 재활용은 아니라 했다. 그 자체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란 거다. 최상의 방법은 ‘줄여라’다. 아무리 방법이 발달됐다고 해도 쓰레기가 많아지면 재활용엔 어떤 비용이든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논지다. 잘 처리한다는 보장도 없다. 환경오염은 필수고 기후변화는 그 수순이다. 쓰레기 단 한 가지만으로 암울한 미래 열차는 무한히 달릴 수 있다는 얘기다.
책의 가치는 쓰레기와의 적대관계를 일찌감치 접은 거다. 저자의 목적은, 쓰레기 위에 쌓은 문명과 문명이 매립한 쓰레기의 상관관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투쟁의 단계와 활용의 거점을 지났으니 이젠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할 때란 의미다. 그리 어렵지 않다. 바로 옆에 놓인 쓰레기통을 들여다보라고 했다. 해부하고 분석해 그 안에 숨은 미래를 찾아내란 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