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그럴듯한가. 사실 인류의 역사는 편안과 편리의 역사였다. ‘편하게 좀더 편하게’는 굳이 현자가 나서서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인류 삶의 모토가 됐다. 덕분에 많이 누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제어가 안 되더란 거다. 어제도 오늘도 관심사는 한쪽으로 쏠렸다. 어떻게 하면 더 편안해질 수 있을까. 따지고 보면 기술전쟁도, 인간 감정의 최전선에 위치한 애증관계도 편안을 얻기 위한 복잡한 싸움 중 하나가 아닌가. 편안 추구는 ‘순리’가 됐다.
그런데 아무도 의심치 않았던 편안 추구 본능에 제동을 건 두 사람이 나타난 거다. 심신의학을 연구하는 미국 UCLA 게팬의대 교수와 의학을 인문학에 접목시켜 대중적으로 설파한 작가. 이들의 시비는 한마디로 이거다. “왜 이토록 편리한 세상에 당신은 점점 힘들어지는가.” 이유는 바로 그 편안함 때문이란 거다. 그저 이기일 뿐이라고 전혀 의심치 않았던 편리가 인간 삶을 옥죄고 있더란 말이다.
편안에 대한 경고는 불편을 애써 외면할 때 생긴다. 내성이 떨어진 불편에 먼저 반응을 보이는 건 몸이다. 스트레스 호르몬, 신체의 염증, 세포 노화, 유전자 발현 방식 등등. 불편에 취약해질수록 이들이 일으키는 반란을 온전히 체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폐해는 그 이상이다. 가령 잘 쓰던 PC 인터넷이나 모바일 기기가 멈춰 섰다고 가정해보자. 교통체증 때문에 약속시간이 늦었다고 치자. ‘사소한’이라고 해도 될 이런 상황에 짜증이 솟고 불같이 화를 내고 있다면 이미 편안함에 중독된 거란 뜻이다. ‘편리한 것들은 어떻게 내 삶을 마비시키는가.’ 책은 부제로까지 붙인 이 질문에 대한 충실한 대답이다.
▲불편근육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
그렇다고 불편이 쉬운가. 아니다. 불편을 체화하는 데는 다분히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왜냐고? 불편근육도 사용하지 않으면 위축돼서다. 불편을 성공적으로 다뤄낼 근력운동을 해본 적이 없다면 인생에는 사사건건 태클이 걸린다. 자동음성안내 수신 중 어이없이 격해진다거나, 조금만 아파도 불치병 같다고 우울해하고, 항상 해야 할 일로 머리를 굴리고 있다면 불편근육이 아주 제대로 퇴화한 거라 진단할 수 있다.
저자들의 잣대에서 원시와 현대가 다른 점을 딱 한 가지만 고르라면 단연 편안의 위치다. 아주 오래된 옛날엔 편안을 추구하는 것이 생존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현대는? 당연히 달라졌다. 편안을 버리는 것이 생존으로 가는 확실한 길이 됐다는 거다. 불편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문명이 계속 발달하는 ‘험준한’ 시대에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했다. 절대명제도 바뀌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바로 불편을 즐기는 것이다.”
▲생존본능의 이중성
분석을 위해 키워드로 꺼내든 게 있다. ‘생존본능’이다. 사람들 내면에 새겨진 일종의 프로그램. 생존본능은 결정적 순간에 살아남기 위해 직관적으로 해야 할 일을 통제한다. 화재가 난 공간에서 뛰쳐나오게 하거나 외부의 압력에는 방어태세를 갖춰 자신을 보호하려는 일 등이 대표적이다.
▲불편하다고? 잘살고 있다는 뜻
불편 품귀시대. 편안은 서서히 혹은 일시에 삶을 무너뜨릴 수 있다. 극도로 예민하게 구는 생존본능을 억누르는 것도, 항우울제·진통제 등으로 쉽게 불안을 다스리려는 행태를 다잡는 것도 불편의 역할을 되돌리는 데 달렸다고 저자들은 단언한다. 불편과 협력관계를 형성하고 나면 생존본능은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불편이 곧 생존력이란 의미다.
한 가지 더. 재난에 맥없이 허물어지는 것도 저자들의 이론대로라면 결국 불편을 외면한 결과다. 의무와 배려에 앞서 자신만의 생존본능을 발동시킨 이들의 어처구니없는 선택도 같은 맥락이다. 편리만을 겨냥해온 시스템이란 게 얼마나 무기력한가. 미처 그 사실을 간파하지 못한 잘못은 끝내 치명적인 비극을 빚어냈다. 불편으로 맷집 한번 키워보자는 주장을 이토록 아프게 설파하게 될 줄은 저자들 자신도 미처 몰랐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