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갤러리] 산화한 나무의 마지막 유서 '숯의 흐느낌'…이배 '도로잉'

2020년 작
'숯의 작가'가 30여년 해온 '숮작업' 근원
먹 갈아 글씨 쓰듯, 수묵화 농담 만들 듯
숯 가루 물에 개어 붓 가는 길 따라 흘려
  • 등록 2020-05-14 오전 12:15:01

    수정 2020-05-14 오전 12:15:01

이배 ‘도로잉’(사진=조현화랑)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배(64)는 ‘숯의 작가’로 불린다. 30여년간 숯으로 해석한 세상을 그리고 쌓았다. 처음 그가 숯 작품을 내놨을 때, 숯이라면 고기 굽는 데만 쓰는 줄 알았던 이들은 화들짝 했더랬다. 특히 그가 1990년대 초 프랑스로 이주한 뒤 코 높은 그이들을 입 벌어지게 한, 바비큐용 숯으로 휘날리고 붙여낸 ‘동양의 정서’가 말이다.

그런데 왜 굳이 숯인가. “그저 하찮은 물건에 불과하지만 숯 안에는 거대한 자연,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란다. 불에서 살아남았으니 불보다 더한 에너지를 품었다는 걸 오래 전부터 알았던 거다.

캔버스나 종이에 그려내는 것만이 아니다. 뭉텅뭉텅 자르고 덥석덥석 묶은 숯을 공중에 둥둥 떠다니게도 한다. 숯을 잘라 캔버스에 붙인 뒤 아라비아고무를 덧칠하기도 하고(‘불로부터’ 연작), 목탄에서 추출한 검은 안료로 캔버스에 그린 뒤 밀랍 같은 재료로 여러 번 덮어내는 작업도 한다(‘아크릴릭 미디엄’ 연작). 한지에 먹이 스미듯 숯으로 휘두른 자신의 제스처를 화면 안에 묵직하게 심어내는 흔적이란다.

그중 ‘도로잉’(Drawing·2020)은 이 모든 작품에서 근원이 될 ‘붓질’이다. 먹 갈아 글씨를 쓰듯, 수묵화의 농담을 만들 듯, 숯가루에 물을 개어 붓 가는 길 따라 흘려보냈다. 잔뜩 물 먹은 안료가 마른종이를 지나가면서 꺽꺽 흐느끼는 자취를 담아낸 거다. 숯으로 쓴 ‘획’의 시작이자 숯으로 그린 ‘화’의 완결. 끝끝내 재가 돼 산화하는 나무가 남긴 마지막 유서라고 할까.

23일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길 갤러리2, 31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달맞이길과 해운대해변로 조현화랑, 7월 11일까지 제주 제주시 영평길 갤러리2 중선농원서 동시에 여는 ‘이배 개인전’에서 볼 수 있다. 종이에 목탄안료. 150×212㎝. 작가 소장. 조현화랑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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