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태의 코덱스]코덱스, '인간' 다빈치의 기록

  • 등록 2019-08-08 오전 5:00:00

    수정 2019-08-08 오전 5:00:00

[임규태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수석고문]1994년 11월 11일. 500년 된 낡은 고문서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000만달러(364억원)에 팔렸다. 이 책의 이름은 ‘코덱스 레스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4년부터 1508년까지 작성한 친필 노트들의 모음집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책이라는 타이틀은 2017년 3500만달러에 팔린 몰몬경에 넘어간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을 고려한 ‘코덱스 레스터’의 판매 가격은 5700만달러로 추산되어,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책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다.

베일에 싸인 구매자는 빌 게이츠로 밝혀졌다. 그해 멜린다와 결혼한 게이츠는 교육과 자선사업에 여생을 바치겠다는 의미로 이 책을 구입했다. 게이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어머니가 교사이자 자선단체 임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 책의 최초의 소유자는 1719년 영국의 토마스 코크였다. 그가 레스터 백작이 되면서, 그 이름을 따서 ‘코덱스 레스터’라고 불리게 된다. 1980년 석유 기업가 아먼드 해머가 500만달러(현재 가치로 1500만달러)에 사들이면서 ‘코덱스 해머’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었다. 해머 사망 후 다시 경매에 나온 이 책을 게이츠가 사들였다. 현 소유주인 게이츠가 이 책을 다시 경매에 내놓는다면, ‘코덱스 빌 게이츠’라는 새 이름이 추가될 것이다.

다빈치는 지독한 노트광이었다. 그는 항상 종이를 지니고 다녔으며, 순간마다 떠오르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종이위에 글과 스케치로 빽빽하게 적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그의 노트는 3만 페이지에 이른다. 하지만 그의 노트들은 책으로 출간되지는 못했고, 그의 사후 사방으로 흩어진다. 후세 학자들이 흩어진 노트들을 모아 책으로 발간했다.

‘코덱스 레스터’는 다빈치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작은 증거일 뿐이다. 일예로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는 1478년부터 그가 사망한 1519년까지 40년 동안 작성한 노트들의 모음집이다. ‘코덱스 레스터’는 72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는 총 12권에 1119페이지에 달한다. 주제 면에서도 아틀란티쿠스는 미술·의학·조류·천문·역학·건축·무기 등을 망라하고 있다.

다빈치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다빈치 개인의 능력만으로 그런 지위를 얻은 것은 아니다. 그가 탄생한 이듬해 동로마가 오스만 제국의 마호메트 2세에게 멸망한다.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은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타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탈출한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한다. 덕분에 고대 이집트, 페르시아, 헬레니즘의 비기독교적 문화 유산이 자연스럽게 피렌체로 흘러들었다.

지난해 10월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과 노트가 전시돼 있다.(사진출처=AFPBBNEWS)
금융업자였던 메디치 가문은 로마 교황청과 정치, 군사, 금융적으로 애증의 관계였다. 교황과의 긴장감 덕분에 피렌체 시민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비기독교적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며, 이러한 분위기에서 다빈치와 같은 르네상스 맨이 탄생할 수 있었다.

요즘 세대에게 다빈치는 범인이 도달할 수 없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인물로 인식된다. 이러한 인식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상업적 성공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남프랑스 민중들 사이에 퍼진 민간 신화를 뒤섞은 이 소설 덕분에 다빈치는 천재에 더해 신비주의 인간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격상된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그는 평생을 신분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의뢰받은 작품을 중단하기로 악명 높았으며, 자신의 스튜디오를 유지하기 위해 제자들에게 자기 작품의 복제품을 만들어 팔도록 했다. 그는 자신보다 스물다섯 살이나 어린 미켈란젤로의 험담을 하다가 면전에서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노트는 그의 천재성 뿐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그의 노트에는 빨랫감 목록까지 적혀 있었으니까.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시기보다 오랜 기간 동안 체계적인 교육을 받는다. 르네상스 시대를 살던 다빈치가 아무리 뛰어난 천재라고 해도, 현대인의 지적 능력을 넘어설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소설이 만들어낸 가상의 다빈치 이미지대로 그를 초인으로 숭배할 뿐, 스스로 더 나은 인간이 되려 하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은 자신이 신봉하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쌓아올린 지적 능력을 아낌없이 불사른다. 하지만 자신이 지키려는 진실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또 다른 진실이 같은 시간과 공간에 존재한다는 현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주장을 하는 집단이나 개인을 파괴하기 위해 지식의 칼날을 무자비하게 휘두른다.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느끼는 지적 능력으로 자신이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진실’의 진위를 확인하려하지 않는다.

인류 문명이 끊임없이 발전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개인이 현명해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인간은 점점 더 멍청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지적 허영으로 가득 찬 이들이 야만적 행동을 서슴지 않는 광경을 목격할 때마다 러시아 소설가 드미트리 글루코프스키의 작품을 원작으로 만든 게임 ‘메트로’에 등장하는 머리가 허파 꽈리처럼 부풀어 오른 괴물을 떠올린다. 정녕 이 괴물이 미래 인간의 모습이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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