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생산량으로 보았을 때 배는 사과나 감귤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예로부터 배는 수출 효자 종목이었다. 동남아, 특히 대만에서 한국 배에 대한 선호는 매우 높았고, 우리는 대만에 배를 수출하고 대만으로부터는 바나나를 수입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한국의 대표 과일을 배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만은 우리나라와 외교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배 수입 쿼터로 우리를 압박했다. 한국이 한중 수교로 대만과 단교 조치를 내렸을 때, 대만은 변절자 한국에게 ‘배 수입 금지’로 벌을 주기도 했다.
배를 수출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과일인 사과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사과는 2018년 기준 2867t을 764만 달러에 수출한데 반해, 배는 3만3012t을 수출했고 그 금액은 무려 8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사과보다 10배 정도 더 많이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들이 한국의 과일을 이야기할 때 주로 배를 거론하고 있으며,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배를 먹어보고 그 맛에 반하였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의 고백은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2017년 한국 갤럽과 농민신문사가 전국 1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과일’에서 배는 겨우 15위에 머물렀다. 새초롬한 딸기가 1위를 차지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망고(8위), 체리(10위)에게도 밀려 버렸다. 20년 전인 1997년 광주 지역 소비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과일 선호 조사에서 배는 2위(12.3%)로 1위인 포도(13.8%)에 근사한 수치로 뒤졌는데, 20년간 국내 소비자들에게 배의 지위는 급락했다. 1인당 소비량도 2008년 9.2kg에서 2016년 기준 4.1kg으로 크게 줄었다. 실제 국내 배 재배면적도 크게 줄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에 1만5081ha였던 배 재배 면적은 2017년 1만861ha로 재배 면적의 1/3이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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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 정도까지 읽고 ‘어, 이상한데? 배는 요즘 아주 트렌디한 과일인데?’라는 의구심이 들었다면, 당신은 분명히 트렌디한 사람이다. 그렇다. 실은 배는 새 옷을 갈아입으며 변신에 성공하고 있다. 국내 식품 제조사 H사의 배과즙 음료가 해외 남성패션 잡지인 ‘GQ’에 동방의 신비한 숙취해소 음료로 소개 기사가 나면서 국외에서 주목을 받은 후, 역으로 국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이 덕택에 국내 배과즙음료 시장은, aT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대비 2017년 무려 두 배나 성장했으며, 요즘 새벽 한 두 시쯤 편의점 앞을 보면 취기와 흥이 오른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배과즙 음료를 들이키는 ‘트렌디’한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019년 배를 소비하는 트렌드는 ‘먹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다. 생과를 집에서 즐길 수 없는 아쉬움을 숙취해소 음료로 즐기고 있고, 이 음료가 노친네 취급받던 과일 배를 가장 트렌디한 과일로 만들며 우울했던 배 재배 산업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배는 가공으로 거듭나고 있다. 식품 가공, 우습게보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