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훈의 맛있는 혁신]나는 처음부터 배가 좋았다

  • 등록 2019-02-14 오전 5:00:00

    수정 2019-02-14 오후 5:04:18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나는 처음부터 배가 좋았다. 어렸을 때 엄마가 깎아주는 배에서 좌측 하단 1m 이내의 거리에 앉아, 사과라면 ‘사각사각’ 깎였을 테지만 배라서 ‘투둑투둑’ 맛이 실린 그 묵직한 소리를 들으며 어서 먹을 수 있길 기다렸다. 배를 깨물었을 때 아삭하게 터지는 그 달고 시원한 과즙은 상상만 해도 좋다. 사과나 귤은 ‘혹시 시면 어떡하지?’
라는 일말의 불안감이 있지만, 배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배는 무조건 맛있으니까. 지금은 아내의 정면 1.5m 이내의 거리에서 그 ‘투둑투둑’ 맛있게 깎이는 소리를 들으며 어서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예전 내 자리였던 좌측 하단 1m의 자리는 우리 집 막내가 차지하고 엄마를 올려다보고 있다.

국내 생산량으로 보았을 때 배는 사과나 감귤을 따라가진 못하지만, 예로부터 배는 수출 효자 종목이었다. 동남아, 특히 대만에서 한국 배에 대한 선호는 매우 높았고, 우리는 대만에 배를 수출하고 대만으로부터는 바나나를 수입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한국의 대표 과일을 배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만은 우리나라와 외교적 갈등이 있을 때마다 배 수입 쿼터로 우리를 압박했다. 한국이 한중 수교로 대만과 단교 조치를 내렸을 때, 대만은 변절자 한국에게 ‘배 수입 금지’로 벌을 주기도 했다.

배를 수출의 관점에서 보자면 국내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과일인 사과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 사과는 2018년 기준 2867t을 764만 달러에 수출한데 반해, 배는 3만3012t을 수출했고 그 금액은 무려 8000만 달러를 넘어섰다. 사과보다 10배 정도 더 많이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들이 한국의 과일을 이야기할 때 주로 배를 거론하고 있으며, 많은 외국인들이 한국 배를 먹어보고 그 맛에 반하였다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의 고백은 이제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러나 2017년 한국 갤럽과 농민신문사가 전국 1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과일’에서 배는 겨우 15위에 머물렀다. 새초롬한 딸기가 1위를 차지했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망고(8위), 체리(10위)에게도 밀려 버렸다. 20년 전인 1997년 광주 지역 소비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과일 선호 조사에서 배는 2위(12.3%)로 1위인 포도(13.8%)에 근사한 수치로 뒤졌는데, 20년간 국내 소비자들에게 배의 지위는 급락했다. 1인당 소비량도 2008년 9.2kg에서 2016년 기준 4.1kg으로 크게 줄었다. 실제 국내 배 재배면적도 크게 줄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1년에 1만5081ha였던 배 재배 면적은 2017년 1만861ha로 재배 면적의 1/3이 사라져 버렸다.

만인의 연인이었던 배는 어떡하다가 이런 비련의 처지가 되었을까? 요즘 주가를 한참 올리고 있는 딸기, 체리, 자두 등과 비교해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이 두 가지 있다. 먼저 덩치가 크다. 예전엔 덩치가 큰 것이 미덕이었지만, 요즘은 한 입에 끝낼 수 있는 사이즈가 인기다. 가족 수가 많았던 시절엔 큰 배 하나면 모든 가족이 후식으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지만, 1~2인 가구가 대세인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혼자서 배 하나를 다 먹는 것은 배를 식사로 하는 게 아니라면 거의 불가능하다. 남는 과일을 냉장고에 넣는 것은 집에서 식사하는 횟수가 줄어드는 요즘 식문화에서는 전혀 선호되지 않는 행동이다.

(사진=이미지투데이)
배의 또 다른 치명적인 약점은 칼을 써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은 요거트도 떠먹는 게 귀찮아서 마시는 요거트가 다시 인기를 얻는 시대다. 껍질이 두꺼운 배는 칼 없이는 먹을 수 없고, 칼을 쓰는 건 귀찮다. 그리고 칼을 쓰면 껍질이 남는다. 선호되지 않는다. 깔끔하게 사라져야 좋은 과일 취급을 받는다. 지난 2018년 여름의 지배자 샤인 머스캣을 보라. 껍질 하나, 씨앗 하나 남지 않는 깔끔함이 그 매력이지 않았던가.

서울대 푸드비즈니스랩에서 농촌진흥청의 소비자 패널 데이터 분석을 통해 대한민국 주부들의 배 구매 시점을 조사해보니, 2017년 기준 가구당 연간 배 구매액의 70~80%가 1월 말, 2월초와 9월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3월부터 8월까지는 구매가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여기서 악순환이 시작되는데, 일부 배 생산자들은 소비자들이 배를 주로 찾는 설과 추석에 출하시기를 맞추다 보니 종종 설익은 배를 성급히 내놓기도 했다. 이런 배는 맛이 떫다. 떫은 배를 경험한 소비자들은 다시는 ‘식용’으로 배를 찾지 않는다. 제수용 및 차례용으로만 구매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렇게 배의 지위는 설과 추석의 차례 상 위의 모퉁이 ‘늙은이’ 지위로만 남아버렸다.

자, 여기 정도까지 읽고 ‘어, 이상한데? 배는 요즘 아주 트렌디한 과일인데?’라는 의구심이 들었다면, 당신은 분명히 트렌디한 사람이다. 그렇다. 실은 배는 새 옷을 갈아입으며 변신에 성공하고 있다. 국내 식품 제조사 H사의 배과즙 음료가 해외 남성패션 잡지인 ‘GQ’에 동방의 신비한 숙취해소 음료로 소개 기사가 나면서 국외에서 주목을 받은 후, 역으로 국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했다. 이 덕택에 국내 배과즙음료 시장은, aT 자료에 따르면 2016년 대비 2017년 무려 두 배나 성장했으며, 요즘 새벽 한 두 시쯤 편의점 앞을 보면 취기와 흥이 오른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배과즙 음료를 들이키는 ‘트렌디’한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2019년 배를 소비하는 트렌드는 ‘먹는 것’이 아니라 ‘마시는 것’이다. 생과를 집에서 즐길 수 없는 아쉬움을 숙취해소 음료로 즐기고 있고, 이 음료가 노친네 취급받던 과일 배를 가장 트렌디한 과일로 만들며 우울했던 배 재배 산업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다. 배는 가공으로 거듭나고 있다. 식품 가공, 우습게보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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