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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리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1929년 경제대공황으로 절망에 빠진 미국인들은 비틀린 영웅에 열광한다. 그 대상은 매혹적인 ‘커플갱’. 자살이 끝없던 때 대리충족 대상으로 절묘하게 극적이었을 것이다.
1967년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출발이 됐던 아서 펜 감독의 영화 ‘보니 앤 클라이드’는 당시 반전사상과 폭동으로 혼란한 미국 사회에 대리충족의 영웅을 재탄생시켜 줬다. 하지만 2009년 캘리포니아에서 초연해 2013년 한국 무대에 오른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는 그 전설적인 보니 앤 클라이드를 그들의 실존만큼 또 영화만큼 강렬하게 부활시키지는 못했다.
시간과 공간이 종횡무진하고 실제 영상이 툭툭 관객을 환기시키는 영화 시퀀스 같은 장면들, 당시 텍사스를 연상시키는 목조 벽체 3개로 치밀하게 암전도 없이 전개시킨 무대 전환은 단연 돋보인다. 백미는 따로 있다. 피투성이 보니 앤 클라이드를 미학적으로 강조하며 결말을 먼저 보여주는 첫 장면과 영상은 처참한 그들의 최후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보니 앤 클라이드가 행복한 얼굴로 미래를 향해 달리는 마지막 장면의 환치는 영화에서는 불가능한 무대 문법으로서 화룡점정이다.
그런데 주지사·보안관·간수 등 대립하는 인물들은 모두 허세를 부리며 만화처럼 웃는다. 상대적으로 지나치게 희화화된 연출 설정도 아쉽다. 차라리 모든 인물에 담백한 진정성을 부여했다면 작품 톤의 일관성과 정서적인 공감이 더 컸을 수 있다. 더불어 조연들의 설 자리도 확실했을 것이다. 어린 자신을 붙잡고 ‘이 세계는 죽든지 죽이든지야, 왜 태어났는지, 왜 이런 혼란을 만들었는지’ 흐느끼는 클라이드도 더 자연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이렇게 됐다면 아기 병사에서 ‘마초남’으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박형식이 더 깊이 있게 환골탈태할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