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땅에서 캐냈다, 돌이 된 '어린왕자'

△갤러리작서 '어린왕자의 꿈' 전 연 작가 이영섭
유래없는 발굴조각…땅속서 굳힌 형상 빼내
정·망치·주물로 빚어낸 평범한 작품이 아닌
땅·색·시간 머금은 '숙성'이 필요한 조각으로
  • 등록 2022-08-25 오전 4:30:00

    수정 2022-08-25 오전 4:30:00

이영섭 ‘어린왕자’(2206 Blue·2022, 혼합재료, 116×62×33㎝·왼쪽)와 ‘어린왕자’(2205·2022, 혼합재료, 76×43×25㎝)(사진=갤러리작)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누구도 만난 적은 없지만 누구나 만난 듯 알고 있다. 뽀글거리다 못해 삐죽이 뻗친 머리에 긴 망토 같은 외투를 두르고 가끔은 바람결에 휘날리는 스카프까지. ‘어린왕자’다. 생텍쥐페리의 소설이든 그림이든 숱하게 봐왔지만 이런 형상은 대부분 처음일 거다. 돌이 된 어린왕자라니. 그것도 구멍이 숭숭 난 거친 질감을 입고, 왕자란 호칭이 무색하게 소박하고 투박한.

작가 이영섭은 조각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그 작업이 아니다. 정으로 쪼고 칼로 깎는 게 아니며, 주물로 본을 뜬 뒤 형상을 빼내는 건 더더욱 아니다. 굳이 붙인 이름이 ‘발굴조각’이라는데, 말 그대로 땅속에 묻힌 걸 캐내는 거다. 물론 묻는 것도, 캐는 것도 작가 자신이다.

방식은 이렇단다. 아예 작업실 한쪽에 만들어둔 흙마당을 파내고 맨땅에 밑그림을 그린 거푸집 안에 유리·보석, 백자·분청사기 파편, 돌 등을 넣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마치 연금술사가 쓸 법한 비장의 ‘혼합재료’까지 부은 뒤에 말이다. 이후는 기다림. 한 달 남짓 뒤 덮인 흙을 털어내면 굳어 있는 ‘작품’을 발굴할 수 있다니까.

숙성이 필요한 조각. 땅과 색·시간을 잔뜩 머금은 ‘어린왕자’(2022)를 비롯해 소녀(‘바다’ 2022)와 소년(‘열정’ 2022), 동화 속 아이들(‘하트양갈래머리’ 2021 & ‘튤립’ 2022)이 다시 태어났다.

9월 8일까지 서울 서초구 매헌로16 갤러리작서 여는 개인전 ‘어린왕자의 꿈’에서 볼 수 있다. 제주와 함께 호흡하며 풍광·자연·사람을 빚어낸 신작 20여점을 세웠다.

이영섭의 ‘바다(소녀)’(2022, 혼합재료, 70×20×17㎝·왼쪽)와 ‘열정’(2022, 혼합재료, 69×28×18㎝)(사진=갤러리작)
이영섭 ‘하트양갈래머리’(동화 2104·2021, 혼합재료, 57×20×14㎝·왼쪽)와 ‘튤립(헌화)’(2022, 혼합재료, 57×22×17㎝)(사진=갤러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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