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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 미술평론가] 사람의 기억은 참 이상합니다. 좋은 기억은 슬픈 기억보다 금방 사라지곤 합니다. 정신건강의 측면에서라도 좋은 기억이 오래 남으면 더 좋겠지만 아쉽게도 슬프고 상처받은 기억이 오래갑니다. 아마 즐거운 추억은 머리에 남고 아픈 상처는 가슴에 새겨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4월에는 4·19혁명의 영광스러운 기억도 있지만 세월호 참사의 고통스러운 기억도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 2014년 4월 16일 7년 전 바로 오늘, 국민을 울음바다로 몰아넣은 그 일 말입니다. 그때 아이들이 우리 큰아이와 동갑내기였기에 더욱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하고 쓰라립니다. 그날 이후 어느 바다에도 발 한 번 담가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바다가 원망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위급하고 절실한 상황이 되면 절대자 또는 신에게 기도를 합니다. 한국 근현대화단의 거장 운보 김기창(1913∼2001)이 그린 ‘예수의 생애’ 시리즈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 성화입니다.
갓·두루마기…한국식 복장의 예수와 제자들
푸른빛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는 아름다운 색에 비해 성난 모습입니다. 흰 포말을 그리는 파도가 연이어 넘실대 보기만 해도 배멀미가 날 듯합니다. 바다에 허리까지 빠진 인물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갓을 쓴 채 두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그 두 손을 잡은 하얀 손의 인물은 갓끈과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고무신을 신은 채 바다에 서 있습니다. 그는 옥색 두루마기와 붉은색 허리끈을 착용했고 왼쪽 어깨로는 검은색 복건이 길게 내려와 있습니다.
김기창이 그린 그는 바로 예수입니다. 일반인과 구별하고자 성스러운 인물에서만 나타나는 두광을 그려 넣었습니다. 위쪽에는 거의 침몰 직전인 작은 나룻배가 있고 배 위에는 바닷물을 뒤집어쓰거나 난간을 잡고 구세주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물 위를 걷다’(1952∼1953)입니다. 한국식 인물과 의복, 한국적 정서로 그린 한국화지만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이 아니라 성경 구절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로 ‘마태복음’ 14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의 내용에 따르면 그림에서 물에 빠져 예수의 손을 잡고 있는 인물이 베드로입니다. 배 위의 사람들도 모두 예수의 제자고요. 한국식 복장을 한 예수와 제자들이라니 익숙하면서도 참 낯선 그림입니다. 그렇다면 김기창은 어찌 이런 성화를 그렸을까요. 김기창은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30대 후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전북 군산시 구암동 처가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중 참혹한 전쟁의 고통이 빨리 끝나고 평화가 오기를 기원하며 ‘예수의 생애’ 연작을 그리게 됩니다. ‘물 위를 걷다’는 이 연작 30점 중 바다에 빠진 제자를 구원하는 장면으로, 당시 전쟁과 가난의 고통으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예수를 통해서라도 고난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이런 간절한 인간의 고통을 어루만져주는 구세주 역할을 불교에서는 관음보살이 맡고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사람들이 정말 급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이름만 부르면 어디서든 달려와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는 불교의 대표적 대승보살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모든 불교국가에서 가장 인기가 있습니다. 관음보살은 남해의 보타락가산에 상주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어 바다와 함께 묘사되곤 합니다. 고려 불화뿐 아니라 조선 회화에서도 바다와 함께 묘사한 작품이 있는데 바로 단원 김홍도(1745∼1806?)의 ‘남해관음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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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화관을 쓴 관음보살이 넘실거리는 바다 위에 서 있습니다. 옷은 아주 부드러운 필선으로 풍성하게 표현했는데, 김홍도가 풍속화에서 보여줬던 강한 의복선과는 전혀 다른 필법입니다. 이런 의복 표현법을 물결에도 동일하게 사용했는데, 마치 떠가는 구름, 흐르는 물과 같다는 의미로 ‘행운유수묘’(行雲流水描)라 불리는 묘법입니다. 같은 필법이기에 바다와 관음이 자연스럽게 하나가 돼 마치 바다에서 솟아오른 듯한 생동감을 전해줍니다. 바다와 하늘은 둘 다 푸른빛이고 머리 뒤로는 ‘두광 같은 달’ ‘달 같은 두광’을 표현했습니다.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주변의 구름을 그려 마치 달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홍운탁월’(烘雲托月) 기법을 썼습니다.
선재동자를 등 뒤에 두고 고난을 막는 관음보살
“쓸쓸히 홀로 벗어나 매인 데 없으니 구름 자취 학 모습 더욱 짝할 수 없네/ 이미 삼천리 안에 앉지도 않았고 또한 삼천리 밖에 서지도 않았으니/ 이는 천리마가 봄바람 살랑이는 광야에 있는 것 같고/ 신령스런 용이 밝은 달 비추는 창해에 있는 것 같다”(송월헌 주인). “남쪽 비니원(석가여래의 탄생지 룸비니) 가운데 연꽃 위에서 탄생하고/ 천하에 무위도를 실행해 고해에 빠진 이들을 건져내고/ 불난 집에서 불타는 이들을 구해냈으나/ 초연히 창해만리 밖에 우뚝 홀로 서 있으니/ 천상천하에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는 글 그대로구나.”
김홍도는 연풍현감으로 재직할 때부터 점차 불교에 귀의해 여러 점의 불상·승려·사찰 등을 화폭에 담았습니다. ‘남해관음’은 낙관과 화풍으로 보아 김홍도의 말년 작품으로 추측됩니다.
7년 전 대한민국 어른들은 꽃 같은 아이들을 세상의 가장 큰 파도 앞에 아무런 방패 없이 세웠습니다. 그러고도 일부 어른들은 변명하고,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왜곡하며 심지어 유가족을 조롱했습니다. 그런 세월호 참사 이후 벌써 7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그 책임과 원인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지금이라도 사고의 원인이 명확히 밝혀지고 책임자에 대한 준엄한 법의 심판이 내려져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는 예수, 선재동자를 보호하듯 막아선 관음보살처럼 이제는 어른들이 앞장서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4월이 더 이상 아픈 기억 없는 꽃 피고 아름다운 계절로만 남길 바랍니다.
※ 운보 김기창과 ‘예수의 생애’
‘청력 상실을 극복하고 한국 근현대화단에 우뚝 선 천재화가’. 운보 김기창을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그림을 시작한 건 어머니 덕이다. 화가로 키울 것을 결심하고 클래스에 들던 이당 김은호(1892∼1979)를 찾아가면서다. 입문 반년 만에 1931년 조선예술전람회에서 입선을 하고 6년 연속해서 특선까지 휩쓸자 ‘장애를 극복한 재능’이라며 다들 입을 모았다. 글솜씨도 좋았다는 그는 해방 후 신문사에서 문화부 기자 겸 삽화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화가로서의 길을 열어줬다면 그 길을 다져준 이는 아내다. 우향 박래현(1920∼1976)이다. 평생 남편의 그늘에 가려 있었지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을 만큼 뛰어난 화가였던 아내는 삶의 반려자이자 예술적 동반자였다. 피란길의 역작 ‘예수의 생애’가 나온 곳도 아내의 친정인 전북 군산. 1952∼1953년 1년여에 걸쳐 완성한 ‘예수의 생애’ 29점은 1954년 4월 서울 종로 화신화랑에서 첫 전시를 하고, 이후 해외순회전을 이어갈 만큼 반응이 뜨거웠다. 첫 전시 후 한 독일 신부가 ‘예수 부활’ 장면이 빠졌다며 1점 더 그리기를 권해 3년 뒤(1957)에 이를 완성, 30점을 채웠다. 빠른 운필과 뛰어난 구성력을 앞세운 ‘예수의 생애’는 독자적인 기법으로 그려낸 예수의 일대기라는 점에서 한국회화사는 물론 세계기독교미술사를 통틀어서도 중요하고 독창적인 작품으로 평가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