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훈의 맛있는 혁신]치킨 바게닝 파워

  • 등록 2019-06-13 오전 5:00:00

    수정 2019-06-13 오전 5:00:00

[문정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푸드비즈니스랩 소장]경영학에서 주로 쓰는 ‘바게닝 파워(Bargaining Power)’라는 용어는 우리말로 흔히 ‘교섭력’으로 번역된다. 교섭력은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 사이에서의 협상 과정에서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에 관한 것이다. 판매자와 구매자 중 더 큰 교섭력을 지닌 쪽이 물건의 가격과 물량을 조절할 힘을 가질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교섭력
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기업이 가지는 경쟁력의 상당부분은 이 교섭력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보자. 닭을 키우는 농장이 있다. 그리고 근처에 닭을 잡아 주는 도계장이 있다. 농장에서 닭을 키워 시장에 내려면 닭을 잡아야 하는데 이 농장에 도계 시설이 없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이 농장은 옆 도계장을 통해서만 자신의 닭을 시장에 낼 수 있으니 교섭력은 도계장 쪽으로 기운다. 농장이 급히 주문받은 것이 있어 오늘 당장 닭 500마리를 도축해야 하는 상황에서 교섭력을 쥔 도계장 사장님은 배짱을 부릴 수 있다. “어휴. 미리 좀 말씀해 주시지. 오늘 갑자기 이러시면 어떡하나요? 좀 바쁘니 급행으로 하려면 비용 10% 더 내슈.” 이게 교섭력이다. 강력하다. 농장 사장님은 울며 겨자 먹기로 10%를 더 내거나 멀리 있는 다른 도계장을 찾아 나서야 한다.

몇 번 손해를 본 농장 사장님이 ‘도계 시설을 우리 농장에다 짓고 말지’라고 생각하고 도계 시설을 지으면 이제 교섭력이 역전된다. 도계장 사장님이 찾아와서 도계할 때 할인해 주겠다고 사정해도 교섭력이 더 강한 농장 사장님은 콧방귀를 뀐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계장 사장님이 자신의 도계장에 자동화 시설을 투자한다. 1만 마리를 도계하는데 20명의 직원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1명이면 되는 혁신인 것이다. 농장 사장님의 눈이 휘둥그레 질 수밖에 없다. 닭 한 마리를 직접 도계하는데 1000원이 드는데, 옆 도계장으로 가면 100원으로 줄어든다. 교섭력은 다시 도계장 쪽으로 넘어간다. 그런데 비슷한 도계장이 여러 개가 인근에 생기면? 선택권이 늘어 난 농장 사장님에게로 교섭력이 또 돌아온다.

교섭력은 내가 단순히 원한다고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교섭력은 마치 양쪽 끝에 추가 올려진 양팔 저울과 같아서 무거운 추 쪽으로 자연스럽게 기운다. 무거운 추를 가진 쪽은 큰 소리 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그 자체가 불법이거나 비윤리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추의 무게에 따른 저울의 기울어짐을 바꾸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양팔 저울을 받치고 있는 지렛목의 위치를 옮기는 것이다. 지렛목을 움직이면 그에 따라 양팔 저울이 한쪽으로 기운다. 기우는 방향을 아예 반대로 바꿀 수도 있다. 그리고 현실 세계에서 이 지렛목의 위치를 옮기는 역할을 하는 것은 정부의 규제다.

현실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오래 전에는 별다른 규제 없이 소, 돼지, 닭을 도축하여 유통시켰다. 국내에서는 1896년에 처음으로 도축에 관련 법안이 제정 되었고 이어서 여러 가지 규제가 등장했다. 핵심은 정해진 도축장에서 도축하고 위생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를 지나면서 이른바 도축장 현대화 정책으로 위생 요건을 강화하고 폐기물 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축장의 수를 줄이고 자동화 시설을 구비한 대형 도축장을 양성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이 전개된다. 2009년에는 도축장 구조조정법을 시행하며 전국의 도축장 통폐합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고 신규 도축장 설립을 억제함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2019년 기준 닭의 경우 전국에 3000여 개의 농장이 있는데 운영 중인 도계장은 40여개에 불과하다. 돼지의 경우는 6200여 농장에 70여개의 도축장, 소는 무려 10만 농가가 있는데 도축장은 60여개 밖에 없다.

식품 안전과 환경을 고려한 정부의 정책과 규제는 그 때 분명히 옳았다. 동시에 축산 생산자와 도축업자 간의 교섭력 저울을 받치고 있는 지렛목의 위치를 크게 옮겨 놓았다. 도축장은 숫자가 대폭 줄며 대규모화 되고 신규 진입이 억제되어 있는 반면, 축산 생산자들은 숫자가 많고 소규모다. 당연히 저울은 도축장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닭의 예를 좀 더 들어보자. 하림, 참프레, 올품, 동우, 체리부로, 마니커와 같은 대형 도계회사들이 국내 도계물량의 2/3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계약 관계에 있는 생산자로부터 받아온 생닭을 위생적인 시설과 대형화 및 자동화된 공정으로 합리적인 비용에 깨끗하고 좋은 품질의 생닭으로 도계하여 치킨 업체로 넘긴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자동화 시설의 규격에 맞지 않는 닭의 도계, 혹은 생산자의 다른 방식의 도계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도계 시기도 생산자가 정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도계장의 갑질이 아니라 교섭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해지는 역학관계다. 따라서 생산자는 도계장의 시설 규격과 방식에 따라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닭은 좋은 품질에 반해 다양성이 떨어져 마치 공산품처럼 획일화 되어있다. 정부의 정책과 규제에 기인한 교섭력의 움직임이 만든 결과다.

흥미롭게도 올해 농림축산식품부는 안성에 있는 토종닭 전문 ‘조아라’ 농장에 농장 내 자가 도계시설 허가를 내주었다. 조아라 농장은 국내에서 가장 큰 사이즈의 토종닭을 기르는 농장으로 사료도 일반 사료가 아닌 자체 제작 발효 사료를 먹이며 방목하여 기른다. 이 농장의 닭은 일반 닭들과 그 특성이 매우 다르고, 대형 도계장의 자동화 시설의 규격에 맞지 않아 도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도계 허가로 더욱 차별화된 품질의 닭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잘된 일이다. 농식품부의 농장 내 자가 도축장 허가는 도축장 쪽으로 크게 기울었던 교섭력이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다양성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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