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김은비 기자] 청바지는 오늘날 전 세계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즐겨입는 대표적 일상복이다. 청바지를 만드는 천인 ‘데님’은 누구에게나 친숙한 소재 중 하나다. 하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데님 소재는 다소 불편하게 다가온다. 미국 역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데님은 서아프리카에서 인디고(데님의 주재료)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노예 노동문제부터, 카우보이·노동자가 청바지를 주로 입어 한때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등 성별화 문제까지 여러 사회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친숙한 청바지 속 어두운 이면에 주목한 전시가 서울 종로구 팔판동 페로탕 서울에서 개최됐다. 미국 작가 닉 도일(38) 개인전 ‘에브리띵 이즈 파인’이다.
| 닉 도일의 ‘노 원 캔 노우’(no one can know·2021), 나무·가죽·철, 53.3x35.640.6cm(사진=페로탕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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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에 들어서면 데님을 이용해 만들어진 여행용 가방, 유명 상표의 면도 크림, 자판기 등 초대형 일상용품 오브제들이 평화롭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전시 제목 ‘에브리띵 이즈 파인’(everything is fine·모든 게 괜찮다) 그대로인 듯하다. 하지만 작가는 은연 중에 사물에 부여돼 있는 의미에 주목하며 현대 미국 사회에 대한 환상을 비판한다.
전시에는 작가의 신작 20여점이 선보였다. 그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소품을 활용해 성별화된 사회를 조명한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용품을 통해서는 자신을 잃어가는 현대인의 삶을 거울처럼 비추기도 한다.
도일은 과거 육체노동과 남성성을 상징했던 청바지로 오늘날 남성적으로 인식되는 오브제들을 만들어 성별화의 무익함을 드러내고자 했다. 자유를 드러낼 것만 같은 여행 가방은 내부를 텅 비워 공허함을 담았다. 두 개의 올가미·나비넥타이·벨트 등 질식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소품들은 성별화된 사회의 숨 막히는 본질을 대변한다. 그는 “남성성의 편협한 감정을 표현하고 느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비극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 청바지를 소재로 일상 용품을 형상화한 작품을 선보이는 미국 작가 닉 도일(사진=페로탕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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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은 일상의 단조로움을 드러내며 미국에 대한 환상을 비판하기도 한다. 작가가 움직이는 장난감 형태로 만든 작품 시리즈의 신작인 ‘노 원 캔 노우’(no one can know)는 지쳐 체념한 현대인의 회사 속 모습을 보여준다. 책상에 앉아 있는 사람을 닮은 나무 조각은 옆의 손잡이를 돌리면 기어가 작동하며 움직인다. 기어에 따라 산만하게 발로 툭툭 바닥을 치며 움직이는 조각의 모습은 복잡한 기술과 노동이 필요로 하는 영혼 없는 반복성을 보여준다. 반복적 동작 끝에 나무 조각의 시선이 닿은 책상 옆 서랍 속에는 시체가 된 듯한 나무 조각이 나와 섬뜩함 마저 자아낸다. 또 올가미로 형상화된 멀티탭, 번뜩이며 날카로운 면도날 등은 현대 사회에 일상처럼 묻어나 있는 불안한 삶을 비추고 있다.
작품의 첫인상에서 이런 의미들이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을 수 있다. 배수빈 페로탕 전시 디렉터는 “도일의 작품 속 오브제들은 마치 범죄 현장의 사진처럼 감정 없이,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나타난다”며 “하지만 증거 서류가 더 큰 현장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도일의 작품 또한 그러하다”고 부연했다. 전시는 10월 1일까지.
| 닉 도일의 ‘아이 띵크 더 유니버스 이즈 트라잉 투 텔 미 섬띵’(I think the universe is trying to tell me something·2021), 판넬 위에 데님, 182.9x76.2cm(사진=페로탕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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