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건넸을 수도, 최 씨 존재를 모르는 상황에서 좋은 의도로 만드는 재단에 별다른 의심없이 출자했을 수도 있다.
사실 우파 정부든, 좌파 정부든 집권 세력이 정부 예산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국가기간 인프라 투자 등을 위해 재벌이라 불리는 대기업들의 힘을 빌렸던 사례는 적지 않다. 한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만약 정부가 언론사들에게 문화융성을 위한 일이니 출자해 달라고 부탁했으면 이를 거부할 언론사가 몇이나 되겠는가”라면서, 갑자기 뇌물을 준 것으로 취급받는 현실을 답답해했다.
하지만 그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회에 정부와 재벌의 관계, 정확히는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바로 세웠으면 한다. 순수한 마음으로 기부금을 내고도 욕을 먹는다면 문제이나 돈을 낸 기업 중 일부는 특혜성 대가를 바란 측면도 있을 것이다.
최근 국회경제민주화포럼(이종걸, 유승희 공동대표)이 주최한 ‘관치경제 정경유착 본질, 재벌의 지배구조개선이 해답이다’ 토론회에선 정경 유착의 본질적 이유로 5년 단임 대통령 중심제에서 임기 내 경제성장을 바라는 대통령의 조급증을 들었다. 5년 동안 뭔가 숫자로 보여줘야 하다보니 경제적 파급력이 큰 재벌들에게 기댈 수 밖에 없고, 또 투명하지 못한 지배구조를 가진 재벌들일수록 정치권력에 기대 기업을 키우려는 유인이 많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삼성이나 현대차, SK 같은 재벌 해체를 언급하나 그것은 현실성이 낮고 득보다 실이 크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는 “정경유착은 제왕적 대통령제에 대한 개혁을 통해 해결 가능하다”면서 “단순히 정권을 바꾸고 넘어가선 안 되고 국회 의석 배분은 반드시 득표수에 비례하게 해서 소수 정당들도 원내로 들어와 권력 분산을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기업집단의 시너지 효과를 부정할 수 없기에 그룹 콘트롤 타워는 필요하나 지주사로 전환한다고 해서 지배구조가 바뀌는 건 아니다”라면서 “주주총회 활성화(전자·서면 투표제)나 독립적 사외이사 선임(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선출), 엄격한 책임추궁(다중대표 소송, 집단소송,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 같은 상법 개정을 통해 재벌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제력 집중보다 투명한 지배구조 확립이 더 중요한 이유는 이번 사태에서도 드러났다. 미르·K스포츠 재단에 출연한 수십 개의 기업 중 이사회를 연 곳은 KT와 포스코가 유일했다. 다른 기업들은 회사 별로 수십 억원을 갖다 주면서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KT와 포스코에도 정경유착의 그늘이 없는 건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낙하산’ 대표 이사를 내려 보내는 게 일상화됐다. 어찌보면 정치 권력과 재벌 권력간 담합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있다. 투명한 지배구조를 가진 국민기업에 자기 사람을 심은 뒤 다음 정권이 오면 내려놓는 행태는 해당 기업들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저해한다. 내년 3월 주총에서 KT와 포스코는 새로운 대표이사 회장을 뽑는데 촛불 민심을 따르겠다는 정치권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지켜봐야 할 듯 하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앞으로 민·관이 함께 재원을 투자해서 공적인 사업을 하는 것은 아예 없애야 할까. 민관 매칭 펀드를 만들어 스타트업의 창업을 돕는다든지, 신기술을 개발한다는지 하는 일을 전부 없앨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근본적으로는 정부 재원 확충을 통해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는 게 나아 보인다. 업계 관계자는 “무슨 성금이다, 기부금이다 하는 준조세 말고 차라리 과표구간별로 기업들의 순익에 따라 법인세를 올려 그 재원(예산)으로 공적 사업을진행하는 방향이 낫다”고 말했다.
선진국보다 10년 이상 늦은 인공지능(AI) 기술을 선도하자고 삼성전자, LG전자, SK텔레콤, KT, 네이버, 현대자동차, 한화생명 등 7개 기업이 30억 원씩 출자해 만든 지능정보기술연구원(AIRI) 경우만 봐도 그렇다. 여기에 매년 최대 150억 원의 예산을 투입하려 하자 특혜시비가 붙었다. 미래창조과학부 내부에서조차 정부 출연연구소가 아닌 연구소 기업이라는 세련되고 창의적인 형태도 좋지만 처음부터 정부 예산을 늘려 100% 정부 돈으로 하는게 나았다는 얘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