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일 단행된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이 사장은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원톱’ 수장으로 부임했다. 겸임하던 광고회사 제일기획 경영전략담당 보직은 내려왔다. 자신의 주력 분야인 패션 사업에 오롯이 전념하겠다는 뜻이다.
그룹의 지주사 격인 삼성물산, 그 중에서도 그룹 내 최고 ‘패션 전문가’가 이 사장이라는 측면에선 당연한 수순이기도 했다. 하지만 패션부문장에 취임하는 ‘시기’를 두고는 우려하는 이들이 상당했다.
국내 패션산업이 내수경기 침체와 성장세 둔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고, 국내 1위 패션기업인 삼성물산 패션부문의 위상 또한 예전만 같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사장이 패션부문장에 취임하기 직전인 지난해 3분기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220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2010년 이후 삼성물산 패션사업부가 적자를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에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여파에 김포물류센터 화재 등 악재까지 겹쳐 어려움이 더했다. 이 사장의 경영 능력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르는 올해도 패션산업의 전망은 밝지 못하다. 이런 상황에 별도의 승진도 아닌 인사에서 역할과 책임만 커지는 자리를 이 사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룹 내부의 한 관계자는 “위기에 처했을 때 변화의 선봉에 선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라면서 “지난해 최악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며 임직원들의 사기가 꺾일 대로 꺾인 상황에 ‘다시 잘해보자’는 이 사장의 긍정적인 주문이 분위기 쇄신에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날 이 사장은 “지금의 속도보다 10배는 빨라져야 한다”면서 “협업을 통해 내부 역량을 활용하고 경쟁사를 챙겨보라”고 주문했다.
이 사장은 ‘삼성물산의 꿈’을 키워드로 제시하며 “글로벌 브랜드를 갖고 싶고, 삼성물산을 세계적인 회사로 키우겠다”고 거대한 목표를 드러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피드(speed)’, ‘아웃룩(out look)’,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이 필요하다”고 구체적인 실천 방향도 제시했다.
삼성물산 패션 부문은 올해 SPA(제조·유통 일괄형) 브랜드인 ‘에잇세컨즈(eight seconds)’의 중국 진출을 앞두고 있다. 에잇세컨즈는 트렌드를 즉각 반영해 빠르게 제작하고 빠르게 유통시키는 패스트 패션 브랜드로, 이 사장이 직접 3년간의 준비를 거쳐 지난 2012년 론칭했다. 에잇세컨즈는 ‘소비자를 8초 안에 사로잡는다’는 뜻으로 론칭 초기부터 돈을 많이 번다는 뜻의 ‘파차이(發財)’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숫자 8을 선호하는 중화권 소비자를 염두에 두고 이름을 지었다. 이 사장은 에잇세컨즈의 중국 진출을 시작으로 세계화 작업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내외적 활동 강화는 지난해 신규 면세점 유치와 메르스 사태로 한국의 관광 산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이 보여준 ‘행동하는 리더십’을 떠올리게 한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에는 이 사장이 오빠인 이재용 부회장, 언니인 이부진 사장과 비교하면 경영자로서의 색깔이 다소 약했던 것이 사실”이라며 “이 사장은 오빠, 언니와 같은 외유내강형 리더이면서 다정다감한 성격 등 소통에 능한 여성경영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위기의 순간 승부수를 띄운 이 사장이 특유의 전문 지식과 친화력으로 ‘패션 명가’ 삼성의 위상을 얼마나 빨리 회복할 수 있을지 그룹 안팎의 기대가 크다”고 말했다.
이서현 사장은···△1973년 9월20일생 △1996년 파슨스대 패션디자인과 졸업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담당부장 △2002년 패션부문 기획담당 △2010년 제일모직 패션사업총괄 겸 제일기획 전략기획담당 △2012년 제일모직 경영기획담당 겸 제일기획 경영전략부문장 △2015년 삼성물산 패션부문 경영기획담당 사장·제일기획 경영전략담당 △2015년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