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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980년 6월. 그 ‘새벽’은 바다 위에서 봤다. 짓눌린 푸름이 삐져나올 듯한 그 새벽은 바다와 밀착한 육지, 육지와 맞닿은 산세와 뒤엉켜 있었다. 경계가 없는 푸름, 한계가 없는 새벽. 그 장면을 오롯이 지켜봤던 그이는, 비행기 편히 탈 형편도 못 되는 학생이라, 밤새워 페리호를 타고 어두운 바닷길을 가르며 귀향하던 길이었다. 계엄령에, 휴교령에 온통 뒤죽박죽인 세상풍경에 있는 대로 마음을 할퀸 스무 살 청년은 심란한 사정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저 새벽, 그 푸름과 맞닥뜨린 건데. “이 새벽은 온통 푸르구나, 눈물 나게 푸르구나.”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날의 시간, 그 시간의 색이 작가의 뒤통수를 이처럼 오래도록 잡아당기게 될 줄은. “난 80학번이다. 1980년 봄, 당시 정세야 다들 알고 있는 일이고, 대학 1학년 첫 학기를 어찌 보냈는지도 모르게 쫓기듯 제주집으로 향하던 배 위였다. 그때 본 착잡함이 섞인 충격적인 장면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지금 다시 간다고 해도 같은 걸 보진 못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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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바라본 푸름뿐인 새벽은 묵직한 한라산의 산세로 윤곽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산이 가슴 벌려 품은 항구도 꿈틀대기 시작했고. 이후 그 정경은 세상에 여러 차례 나왔다. 숱하게 내놨지만 작가는 기어이 신작으로 또 한 점을 보탰는데. 100호(162.2×130.3㎝) 크기의 유화 ‘새벽-22158’(2021)이다. 제주의 바다를, 제주의 산을 그린 작가가 어디 한둘이겠나. 하지만 바다 위에서 제주의 바다를, 제주의 산을 바라보고 그린 작가는 그이가 유일할 거다. 작가 강승희(61·추계예술대 교수) 말이다.
처음 되돌려 7년째…캔버스·물감으로 다시 그린 ‘새벽’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노화랑에 펼친 ‘강승희 유화전’. 30여점을 건 화랑의 풍경은 온통 푸르렀다. 화업 40년간 줄창 한길로만 걸었다는 작품 ‘새벽’ 연작이 줄지어 붙들거나 멈춰세운 시간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역시 그 ‘새벽’으로 운을 뗐다. “여름에는 여름대로 겨울에는 겨울대로 새벽의 맛이 다르다. 분위기도 다르지만 공기, 여백, 여운, 그 푸른빛도 다르고. 거기에 빠져 지금껏 온 듯하다. 최초의 발상은 ‘여름 오전 5시 30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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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도 힘든데 돈도 안 된다’며 남들은 저만치 미뤄둔 그 작업에 뛰어들어 ‘획을 그어’냈더랬다. 국립현대미술관도 모자라 영국 대영박물관, 중국 중경미술관 등이 기꺼이 작품을 소장한 데 더해, 1991년 ‘제9회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 같은 해 일본 ‘와카야마국제판화비엔날레’ 2등, 2000년 중국 ‘제1회 칭타오국제판화비엔날레’ 동상을 거머쥐는 등 온갖 상도 휩쓸었다. 작가로서만도 아니다. 27년 동안 대학에서 후학까지 양성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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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봤다면 누구라도 유혹에 빠뜨렸던 작가의 강력한 무기는 딱딱한 동판에 흘린 부드러운 수묵기법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작업이라 해도 될 동판 위 날카로운 바늘의 긁힘으로 은근하게 먹이 번지는 듯한 화면을 빚어낼 줄 상상도 못했으니까. 그랬던 그이가 뭐가 아쉬워 좋은 작품에 빛나는 명성까지 다 내려놓고 새삼 붓을 잡았을까.
“문득 한계가 느껴졌다. 아직도 못 다 표현한 새벽은 여전히 푸른데, 몸에 이상신호가 생긴 게 가장 컸다. 동판화 작업은 판을 부식시키는 과정에서 가스가 생긴다. 아무리 철저히 차단한다고 해도 그때 생기는 화공약품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는데, 그게 치명적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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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간 깨어있던 ‘새벽’…“유화로 가는 실험은 계속한다”
그런데 영 녹록지 않았단다. 정서는 그대로인데, 새벽과 푸름은 바로 저기 있는데, 도무지 동판화에 나왔던 표현이 나오지 않았다는 거다. 왜 아니겠나. 오른손잡이가 왼손에 붓을 쥔 듯하지 않았겠는가. 이후로 치열한 사투가 시작됐다. “회화도구라는 게 만만치 않더라. 붓그림으로 따지자면 엄청한 작가들이 해온 걸 당장 따라잡을 수도 없고. 죽어라고 실험에만 매달렸다. 뭐든 다른 것을 찾아내려고.”
결국 그 답은 판화에서 찾아냈다. 스크래퍼와 바늘, 면망사 등 동판화 도구를 유화제작에 들인 건데. “스크래퍼는 물감을 벗겨내기 쉽다. 바늘로는 정교한 질감을 내고. 면망사는 붓으로 칠한 물감을 문질러 고운 분위기를 낸다.” 그렇게 ‘나 죽지 않았다’는 듯, 고요함 속에서 꿈틀대는 정중동의 화면은, 작가가 유화를 향해 새롭게 불을 붙인 욕망과 다를 게 없었다. 숱하게 밤을 새웠고 새벽이 오는 것을 지켜봤다. “유화는 표현이 자유롭다. 욕구만큼 치고 나갈 수도 있고. 작은 화면(판화)에만 매달려야 했던 한도 풀었다. 100호 이상 캔버스를 대하니 확 터지는 듯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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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유화로만 두 번째 개인전이다. 여전히 그이는 기법을 실험하고 색을 실험한다. 2년 전 개인전에서 많이 썼던 블랙을 좀 거둬내고 그 자리에 블루를 더 들였다. 예전보다 고향인 제주에 한 발짝 다가선 것도 차이라면 차이다. “유화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더 한다. 실험이 곧 작품이고, 죽을 때까지 실험을 할 거라고.”
하늘과 땅이 밀착한 저 아래부터 어둠이 깨지는 때, 그 순간에 나서봤다면 안다. 어떤 것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첫새벽은 말이다. 그저 밤을 버티면 저절로 오는 시간이 아닌 거다. “눈물겹게 얻어낸 서정성”이라 한 작가에게는 유화란 게 그 새벽이 아니었을까. 전시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