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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김은비 기자] 길고 치렁한 장막이 걷히고 이제야 빛이 든다. 야무지게 싸이고 첩첩이 가려진 채 어두운 수장고에서, 길게는 수십년씩 잠들어있었을 명작·명품들. 우린 이들을 ‘이건희컬렉션’이라 불렀다. 눈으론 확인조차 못하고 귀와 입으로만 봤던 작품들. 그 긴 잠을 깨우려 올 초부터 애꿎은 소문만 그리도 무성했던 건가.
‘이건희컬렉션’이 본격적으로 베일을 벗고 면면을 드러내는 전시가 국내 양대 국립기관인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1일 동시에 개막한다. 지난 4월 28일 이건희(1941∼2020) 회장 유족이 기증의사를 밝힌 지 석 달만이다. 기절하듯 잠든 시간은 오래였지만 깨워 일으키는 데는 그리 한참 걸리지 않았다.
그새 양구·대구·광주 등 전국 지방 미술관으로 흩어진 이건희컬렉션이 일부 공개되긴 했지만, ‘이건희 소장품’의 대표작, 그 진수를 집중적으로 뽑아낸 전시는 처음이다. 그것도 규모가 적잖다. 문화재·고미술품에서 골라낸 77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한국 근현대미술에서 선정한 58점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리고 세워졌다. ‘이건희 기증품’ 중 가장 크고 가장 많은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게 한 의의를 충족시킨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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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품으로” 보내겠다던 이건희 회장의 유지가 비로소 피부에 닿는 현실이 됐다고 할까. 미리 가본 현장에선 어디에 머물든 감탄과 탄식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역시!”와 “왜 이제야?”가 뒤섞일 수밖에 없는 자리다.
‘이건희 얼굴’인 듯…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폭 6m에 달하는 압도적 화폭(281.5×567㎝)은 그 앞에 선 이가 누구든 기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김환기(1913∼1974)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가 말이다. 국내 미술관 중 규모로는 따라갈 데가 없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한 벽을 그득히 채운 작품은 가히 ‘이건희의 얼굴’이라 해도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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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나를 내리누르는 듯한 거침없는 기세가 돋보이는 이중섭(1916∼1956)의 ‘소’ 그림도 보는 이들을 놀라게 하긴 마찬가지. 거칠고 강렬한 선·색에 압도돼 거대한 작품일 거라 여겨왔던 착각을 무심히 깨기 때문이다. 참으로 오랜만에 해후했을, 흰 벽에 나란히 걸린 ‘황소’(1950s)와 ‘흰소’(1950s)는 의외로 작은(각각 26.5×36.7㎝, 30.5×41.5㎝) 크기에 되레 가슴이 먹먹하다. ‘황소’는 현전하는 4점뿐이라는 ‘붉은 황소의 머리’ 그림 중 한 점이고, ‘흰소’는 5점만 전한다는 그림 중 하나다. ‘황소’는 1990년 발간된 이중섭화집에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었고, ‘흰소’는 1972년 전시 이후 행방이 묘연했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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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이 내세운 전시명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이다. 기증받은 1488점 중 한국 근현대미술의 회화·조각 걸작 58점을 골랐다. 이 회장 유족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작품은 한국 근현대미술작가 238명의 작품 1369점과 외국 근대작가 8명의 작품 119점. 그중 작가 34명의 58점이니 ‘정수 중 정수’라 할 만하다. 서울관 제1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기증 당시 이미 화제가 됐던 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김환기의 여인(‘여인들과 항아리’)과 박수근(1914∼1965)의 여인(‘절구질 여인’ 1954)이 마주보고 있고, 이중섭 소들 너머로는 장욱진(1918∼1990)의 여리한 형상들(‘나룻배’ 1951, ‘공기놀이’ 1938 등)이 겹친다. 그 곁을 떠나면 귀한 작가보다 더 희귀한 작품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백남순의 ‘낙원’(1936), 이상범의 ‘무릉도원’(1922), 김종태의 ‘사내아이’(1929), 이성자의 ‘천 년의 고가’(1961), 김흥수의 ‘한국의 여인들’(1959) 등등. 여기에 이응노, 권진규, 천경자, 남관, 김종영 등, 그 거친 시대를 이끌고 풍미했던 그이들이 어김없이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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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첫 컬렉션’…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
국립중앙박물관이 내건 전시명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함께 누리다: 고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 역시 기증받은 2만 1693점 중 77점(45건)을 엄선해, 상설전시실 2층 서화실에 펼쳐놓았다. 그중 국보가 12건, 보물이 16건이다. 다만 새로운 것을 꺼내놓기보다 “이미 잘 알려진 유물의 진가를 보이는 데 목적”을 뒀다. 그만큼 시대를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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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철기시대 청동기로 당시 권력을 상징했던 ‘청동방울’(국보 제255호)이 그 대표적 유물이다. 기술혁신과 디자인을 중시한 이 회장의 철학이 엿보이는 거다. 6세기 삼국시대에 제작된 ‘일광삼존상’(국보 제134호)은 손가락만한 작은 청동에 화려한 불꽃무늬를 치밀하게 새겨 넣어 성스럽고 고결하다. 18세기 조선의 ‘백자청화산수무늬병’(보물 제1390)은 넉넉한 기형화 문양 덕에 푸근하고 여유롭다.
이외에도 글씨와 그림이 빼어난 고려 사경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국보 제235호), 현존하는 유일의 ‘천수관음보살도’(보물 제2015호), 단원 김홍도(1757~1806?)가 말년에 그린 ‘추성부도’(보물 제1393호), 한글 창제의 결실을 엿보게 하는 조선 초기 서적 ‘석보상절 권11’ ‘월인석보 권11·12’ ‘월인석보 권17·18’ 등이 고고한 품격으로 보는 이들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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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증자의 뜻을 살려 전시는 모두 무료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선 9월 2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선 내년 3월 31일까지다. 다만 국립중앙박물관에선 사전 예약 개시와 동시에 한 달치 티켓이 모두 동났다(국립현대미술관은 내달 1일까지 매진). 이건희의 품을 떠나 국민의 품으로 파고든 ‘이건희컬렉션’에 대한 환대가 이처럼 뜨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