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명문가의 효녀 딸 넷

  • 등록 2018-08-27 오전 5:00:00

    수정 2018-08-27 오전 5:00:00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필자는 어릴 때부터 여행, 특히 그중에서도 함께하는 여행을 좋아했다. 하지만 시골에서 선비수련 일에 몰두하며 지내다보니 근래는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국내여행 가는 것도 쉽지 않다. 바쁜 현직 때도 틈나면 가족을 비롯한 주변지인들의 여행을 주선하고 앞장서는 역할을 맡았던 터라 아쉬운 생각이 많다. 이런 필자에게 해외여행을 다녀온 분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간접여행처럼 느껴져 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치 여행책자를 읽거나 풍광 좋은 영상물을 보는 즐거움과 비견할 만하다.

그간의 여행담 중에 필자의 귀를 쫑긋 세우게 한 것은 지난해 이맘 때 들은 한 가족의 효도 여행 이야기다. 효도가 메말라 가는 세태에 단비같은 이야기여서 지금도 생각만으로 즐겁다. 행복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으니 그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안동 한 종가의 출가한 40~50대 딸 넷이 작년 여름 성수기에 친정부모를 모시고 영국으로 열흘간의 꽤 긴 여행을 다녀왔다. 비용을 아끼려고 일 년 전에 예약을 마쳤다는 알뜰한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그런데 출가한 딸들이 왜 상당기간 남편과 자녀는 남겨두고 친정부모만을 모셨는지 한편으로는 의아했다. 그랬더니 바로 전 해에 부모님의 결혼 50주년을 기념하여 전 가족이 일본 여행을 갔었는데 동행한 각자의 가족들을 돌보느라 정작 부모님은 제대로 모시지 못해 죄송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귀국한 후 깊이 반성하고 다음 여행은 부모님만 모시기로 뜻을 모으고 각자의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했다는 것이다. 요즘 보기 드문 미담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기회가 있어 딸들에게 물었더니 자신들은 단지 자라면서 본 대로 한 것이라 말했다. 이를테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중국을 다녀오시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부모님이 젊은 시절부터 조부모를 모시고 집안 제사와 찾아오는 손님 접대로 편히 쉴 날이 거의 없이 지냈는데 이제 부모는 연로하고 자신들은 능력이 좀 생겼으니 더 늦기 전에 마땅히 할 도리를 한 것뿐이란다.

지극히 맞는 말이며 당연한 이치이다. 어릴 때부터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자란 것이 그대로 산교육이 된 것이다. 딸들은 부모가 자신들의 뒷바라지에 앞서 조부모 봉양에 더 신경을 쓰고 여러 대의 제사도 정성껏 받들 뿐 아니라 무시로 찾아오는 그 많은 손님도 한결같이 대접하는 것을 보며 자랐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동물도 하는 내리사랑보다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치사랑을 보며 효를 배웠고, 내 입 내 식구에 앞서 일가친척 심지어 지나가는 길손에게까지 마음을 베푸는 배려의 삶을 배웠다.

딸들이 기억하는 조모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작고했을 때 인근 대도시의 조화용 국화가 동이 났다고 할 정도로 평생을 베풀며 사신 분이다. 일가친척에게 하나라도 더 싸주었고, 배고픈 이웃을 위해 감자나 고구마를 수확할 때 밭에 늘 절반은 남겨두게도 하였다. 증조부 또한 대단한 분으로, 일제강점기에 노름판 파락호 행세를 하며 독립자금을 몰래 보낸 애국지사이다. 이러한 가풍은 500년 동안 집안의 윗대 조상들을 통해 전해 내려온 것이다. 이것이 딸들로 하여금 부모에 대한 효를 자기 삶의 당연한 일부로 여기게 만든 배경이다. 바로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종가 딸들의 이야기다.

요즘 우리사회에서 효가 사라지고 있다. 그렇게 돈과 시간과 정성을 들여 자녀를 키우는데 왜 그럴까? 물질적인 풍요가 자식을 효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말로 가르친다고 되지도 않는다. 효의 본질은 부모가 하는 것을 보고 자식이 그대로 따라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가 성찰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자신의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는 삶을 살며, 다음으로 이웃과 공동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 길만이 자녀가 효도하게 하는 길이다. 학봉종가 네 딸의 효도를 보며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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