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역사의 흔적따라 '뚜벅뚜벅', 거꾸로 가는 시간여행

인천 강화도 역사여행
최초의 한옥 성당 '강화성당'
고려의 39년 그리움 품은 '고려궁지'
강화읍 에워싼 '강화산성'
  • 등록 2018-11-30 오전 12:00:01

    수정 2018-11-30 오전 12:00:01

인천 강화도 북문길에 있는 고려궁지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강화산성의 북문인 ‘진송루(鎭松樓)’와 이어진다.


[강화도=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인 인천 ‘강화도’. 한양과 개경이라는 오래된 고도(古都) 사이에 있어 참 많은 역사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곳이다. 강화가 강화(江華)로 불린 것은 고려가 세워진 후인 940년 즈음. 원래는 한강·임진강·예성강 등 ‘여러 강을 끼고 있는 아랫마을’이라고 해 ‘강하(江下)’라고 부르다가 ‘강 아래의 아름다운 고을’이라는 뜻으로 ‘강화’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꽤 고단한 섬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이기도 했고, 고려시대에는 몽골 침략을 피해 왕이 천도를 감행한 장소였다. 정묘호란에는 왕이 피신한 곳도 이곳이다. 개화기 서구열강과 일제가 할퀸 역사의 아픈 상처도 고스란히 품었다. 강화도를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부르는 이유다.

강화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문화유산 중 하나인 대한성공회의 ‘강화성당’. 일명 한옥성당이라고도 불린다.


◇최초의 한옥 성당 ‘강화성당’

경기 김포와 인천 강화를 잇는 강화대교를 건너면 ‘강화도’다. 여기서 곧장 읍내로 향하면 최초의 한옥 성당인 ‘강화성당’과 철종의 잠저(왕이 되기 전 살던 집)인 ‘용흥궁’을 만난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사적 424호)은 대한성공회 초대 교주인 고요한에 의해 1900년에 지어진 성당이다. 강화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독특한 문화유산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바로 이 대한성공회의 강화성당이다. 서양 건축 양식을 한국적으로 되살려낸 모습이 건축을 모르는 이들에게조차 무척 이색적이다. 외관은 전통 한옥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바실리카양식으로 꾸며 안팎이 전혀 다른 느낌이다. 강당형 구조에 담백하면서 고고한 한옥의 맛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한옥성당’이라고 불리는 ‘강화성당’. 외관은 전통 한옥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바실리카양식으로 꾸며 안팎이 전혀 다른 느낌이다. 강당형 구조에 담백하면서 고고한 한옥의 맛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성당 이래에는 사제관이 있다. 영국인 선교사들이 1898년 온수리에 선교를 시작한 지 8년 후인 1906년에 길강준 신부가 건축한 건물이다. 1933년 한차례 중수가 있었지만, 건축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사제관의 평면구성은 전통한옥이지만, 내부는 매우 다양하게 조합되어 영국인 신부의 한국전통주거문화에 대한 적응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천정은 구조미를 살리기 위해 노출해 목재의 질탁한 자연미를 표현했다. 건물 형식은 ‘ㄷ’자형 기와집 구조다.

용흥궁도 바로 아래에 있다. 조선 25대 왕인 철종(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거처했던 곳이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고려가 내몽항장을 위해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39년간 사용한 궁굴인 ‘고려궁지’


◇ 고려의 39년 그리움 품은 ‘고려궁지’

강화읍 북문길에는 강화 고려궁지가 있다. 고려가 대몽항쟁을 위해 도읍을 개성에서 강화로 옮긴 후 39년간 사용한 궁궐이다. 이후 몽골의 요구로 궁궐과 성곽을 모두 파괴했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행차 시 머무는 행궁과 유수부 동헌, 외규장각 등이 있었지만 병자호란과 병인양요를 거치며 대부분 소실됐다. 지금은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이방청 등 조선시대 유적만 남았다.

고려궁지의 대표적인 시설은 ‘외규장각’이다. 1782년 조선 왕실과 관련한 서적을 특별히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부에 설치한 도서관이었다.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역할을 했다. 이곳을 ‘외규장각’ 또는 ‘규장외각’이라 이름 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후 100여 년간 조선 후기 왕실 문화의 보고 역할을 했다. 특히 외규장각은 규장각에서도 가치 있는 자료를 보관했다. 익히 알고 있는 의궤는 물론 왕실 관련 문서인 족보와 도장 등을 보관했다.

고려궁지의 대표적인 시설은 ‘외규장각’. 1782년 조선 왕실과 관련한 서적을 특별히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부에 설치했다.


특히 의궤는 국가나 왕실의 주요행사를 기록과 그림으로 남긴 일종의 보고서였다. 왕이 직접 열람하는 어람용 의궤도 이곳에 보관했다. 어람용 의궤 표지는 특별하게 비단을 사용했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를 사용했다. 해서체로 정성 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병인양요 당시 외규장각에 보관 중이던 은덩이 19상자와 함께 프랑스군의 눈을 자극한 것도 채색 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의궤를 만든 이유는 국가 행사의 시행착오를 줄일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행사에 동원했던 인력은 물론 각종 물품과 재료 등을 그림과 함께 상세히 기록했다. 왕실의 주요행사와 의궤를 남긴 것은 조선시대에만 보이는 독특한 전통이다. 서양은 물론 같은 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도 이와 같은 기록 문화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에 2007년 6월 규장각과 장서각에 소장한 ‘조선왕조의궤’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강화산성 성문을 여닫을 때 쳤던 종인 ‘강화동종’.


◇ 세월 속에 잊힌 ‘강화산성’

고려궁지의 또 다른 볼거리는 큰나무와 강화동종이다. 큰나무는 수령 약 400년의 느티나무로, 높이는 20m, 둘레는 4.3m에 달한다. 이 나무는 조선 인조 9년(1631년)에 여러 전각과 행궁을 세울 때 심었던 나무로 보인다. 그러나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옛 건물들은 불에 타 소실되거나, 오래되어 무너지고, 지금은 유수부의 동헌과 이방청 만이 개수되어 남아 있는데, 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이 나무는 영욕의 세울 속에서도 고궁터를 찾는 길손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강화동종은 강화산성 성문을 여닫을 때 쳤던 종이다. 원래는 강화산성 남문에 걸려있었다. 숙종 14년(1688년)에 강화유수 윤지완이 처음 만들었는데 금이 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이후 강화 유수 민진원이 숙종 37년(1711년)에 다시 만들었다. 동종 명문에는 ‘옛 종은 사인(思人)이 만들었고, 다시 만들 때는 조신(祖信)이 만들었다’고 새겨져 있다. 사인은 8개의 동종을 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강화동종이다. 사인이 만든 동종은 현재 모두 보물 11호로 지정되었다.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 강화산성은 망한루·첨화루·안파루·진송루 등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 누각을 갖추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는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와 남장대를 세웠다.


강화산성 북문이 여기서 지척이다. 고려궁지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강화산성 북문인 ‘진송루(鎭松樓)’와 이어진다. 강화산성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가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쌓은 성이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성은 주위 약 1200m다. 이것이 아직 남아있는 강화산성이다. 처음에는 토성이었으나 1637년 병자호란 이후 파괴되고, 조선 숙종 때 전면 보수하면서 강화읍내를 한 바퀴 둘러 7.12km 규모로 확대됐다. 망한루·첨화루·안파루·진송루 등 동서남북에 4개의 성문 누각을 갖추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는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와 남장대를 세웠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쳐들어오는 등 근대까지 역사의 현장이었던 강화산성은 세월 속에 잊혔다가 2003년 동문을 마지막으로 모든 성문을 복원했다.

강화산성 북문 성곽길을 걷고 있는 여행객.


◇여행메모

△가는 길= 서울에서 출발한다면 올림픽대로를 타고 가다 개화 IC에서 48번 국도를 갈아타고 김포를 지나 강화읍으로 향한다.

△그 외 가볼 곳= 강화도 최북단인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지역에 있는 강화평화전망대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 물줄기가 서해와 만나는 강 같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남과 북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맑은 날에는 북한 송악산과 개풍군 들판, 집이 옹기종기 모인 마을이 망원경 없이도 선명히 보일 정도다. 눈으로 보는 것으로는 북한 땅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기 어렵다. 매시 정각(10시~16시)에 진행하는 해설 프로그램이 매우 유용하다.

강화도 최북단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내에 있는 ‘강화평화전망대’.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강화도 최북단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내에 있는 강화평화전망대의 ‘통일염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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