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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세상에는 많은 ‘아버지’들이 있다.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는 갈릴레이나 뉴턴을 꼽고, 음악 쪽은 쇤베르크를 현대 음악의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현대미술에서는 인상주의자들과 마르셀 뒤샹이 후보에 올라 있는 가운데, 앞엣것이 조금 우세한 상황이다. 중국에도 유명한 ‘아버지’가 있다. 한 명은 당연히 오늘날의 중국을 만든 마오쩌둥이다. 또 다른 한 명은 오늘의 주인공이다. 바로 뤄중리(75·羅中立)의 그림 속 ‘아버지’(1980). 이름조차 모르지만, 중국 현대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아버지’인 것만은 확실하다.
세상의 여느 ‘아버지’들처럼 멋진 모습은 아니다. 마른 땅이 쩍쩍 갈라진 것처럼 깊게 파인 주름, 그을린 피부, 피골이 상접한 손, 새까매진 손톱. 그리고 그 손으로 잡은 더러운 그릇. 일평생 논밭에서 고생한 농민 ‘아버지’의 힘겨운 세월이 화면에 찌들어 있다. 1948년 총칭에서 태어나 쓰촨미술대를 졸업한 뤄중리는 이 작품으로 중국 미술사에 영구히 남게 됐다.
여러모로 쇼킹한 그림이지만,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것은 뤄중리의 그림솜씨다. 사진인가 그림인가 싶을 만큼 잘 그렸다. 워낙 소질도 있었겠지만 꽤 탄탄한 미술교육을 받은 데다가 당시 중국 미술에 끼쳤던 미국 미술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1969년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중국과 미국은 덩샤오핑 시대를 맞아 더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다양한 종류의 미국 미술이 중국의 미술잡지에 소개됐는데, 여러 경향 중에서도 특히 사진처럼 똑같이 그리는 극사실주의 계열이 많은 인기를 끌었다.
왼쪽 귀에 꽂은 펜, 농업 현대화 개혁 동참 의지 담겨
왜 하필 극사실주의였을까. 당시 미국에서는 극사실주의 외에도 퍼포먼스, 개념미술, 대지미술 등 정말 많은 새로운 경향이 활개를 쳤는데 말이다(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은 심지어 베이징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유는 역시 역사에 있다. 중국에서는 마오쩌둥 시기에 소련식 사실적인 묘사 방식이 뿌리내렸기에 아무래도 생경한 양식보다는 극사실주의 계열이 받아들여지기 쉬웠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작품의 주인공에게도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다. 뤄중리는 멀리 중국 서북부의 다바산맥에 사는 남자를 모델로 했다. 마을의 지도자와 같은 지위를 가진 것도, 대단한 업적을 이룬 사람도 아니다. 그냥 마을에서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늙은이다. 그런데 그림 속 노인에게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농민과는 딱히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 삽입된 거다. 숨은 그림 찾기 하듯 한번 찾아보자.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이상한 점을 발견했는가. 답은 왼쪽 귀에 꽂고 있는 펜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보아하니 글을 읽고 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난데없이 웬 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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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설에 의하면, 원래 버전에는 펜이 없었다고 한다. 작품을 본 뤄중리의 친구가 펜이라도 하나 꽂으면 어떻겠는지 조언했고, 그 작은 소품 덕분에 ‘가난한 농촌을 구원하려는 덩샤오핑의 개혁 만세!’란 서사가 완성됐다. 이 작품이 1981년, 국가가 주최한 미술전시회에 걸릴 수 있었던 것도 8할은 펜 덕분이었다. 리더가 달라지고, 시대도 변한 것 같지만, 예술이 국가의 정책에 발맞춰야 한다는 규칙은 여전했다.
물론 예전과 달라진 점도 있다. 농민을 그린 방식이다. 마오시대에 그려진 그림에서 농민은 늘 희망에 차 있었다. 현실에서는 굶어 죽는 농민이 수십만 명이었지만, 그림 속에서만큼은 늘 포동포동했고, 아무 걱정 없이 웃으며 풍성하게 곡식을 수확했다. 그러나 뤄중리의 그림은 다르다. 농민은 깡말랐고, 늙었고, 빈곤하다.
이는 1970년대에 뤄중리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현실이었다. 1968년부터 청년들을 농촌으로 ‘하방’시키는 마오쩌둥의 정책에 따라 청소년이던 뤄중리도 다바산맥으로 보내졌는데, 그는 거기서 진짜 농촌을 보았고, 척박한 현실을 살던 농민을 스케치해뒀다. 아마 학교에서 말하던 농촌과 현실의 농촌 사이에서 혼란을 느끼며 ‘본 것’을 기록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림 실력은 이미 출중했지만, 스케치로만 남겨뒀어야 했다. 현실의 농민을 받아들일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이후 드디어 세상이 바뀌었을 때 뤄중리는 스케치북을 꺼내 마오시대의 민낯을 커다란 캔버스에 옮겨 그렸다.
중국 인민이 30년 만에 처음 보는 다른 ‘아버지’
게다가 그 고생한 농민 아버지의 얼굴이 무려 2m가 넘는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것 또한 의미심장한 변화다. 1년 전인 1979년만 하더라도 이만큼이나 크게 그릴 수 있는 대상은 오직 마오쩌둥뿐이었다(지금도 톈안먼광장 중앙에는 ‘중국 인민의 아버지’ 마오쩌둥의 초상이 크게 걸려 있다). 그런 상황에서 뤄중리의 농민 아버지가 거대한 초상으로 무려 국가 전시회에 등장한 거다. 중국 인민으로서는 30년 만에 처음 보는 다른 ‘아버지’였다. 이는 마오쩌둥을 우상화하는 시대가 정말로 막을 내렸다는 것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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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로 중국 사실주의 계열의 대표로 자리매김한 뤄중리는 요즘 ‘미술사 다시 읽기 시리즈’를 선보이고 있다. 서양 미술사에 등장하는 밀레, 세잔, 피카소, 반 고흐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변형해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배경을 검정색으로 칠한 뒤 마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것 같은 현란한 색으로 거칠게 붓질을 해댄다. 미술사를 조금 아는 사람은 ‘원본’이 누구의 것인지, 그러나 색과 필치는 ‘원본’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감지한다.
‘미술사 다시 읽기 시리즈’는 이전의 뤄중리 그림과도 완전히 다르다. 사실적으로 그렇게 잘 그리던 화가였건만 이제는 너무나 ‘표현적’이 됐다. 캡션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아버지’를 그린 화가인지 못 알아볼 거다. 마치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도망칠 수 있는지를 실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시리즈를 통해 뤄중리는 미술사에 ‘명화’로 박제된 작품을 완전히 다시 그렸고, 중국 미술사에 한 페이지를 차지한 자신의 작품으로부터도 확실히 벗어났다. 기존 작품들을 철저히 새롭게 바꾸는 것. 이것이 뤄중리가 생각하는 ‘미술사를 다시 읽는’ 그러므로 ‘다시 쓰는’ 방법일 거다.
올해로 75세가 된 뤄중리는 이렇게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중국의, 미술의, 또 자신의 역사를 다시 써내려가고 있다. 그의 붓끝에서 태어날 새로운 역사를 오래도록 보고 싶다.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