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근안입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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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당직실 직원은 사무실 벽에 붙어 있던 ‘수배자 명단’에서 이근안 사진을 다시 한번 확인한 후 곧바로 당직검사에게 이를 보고했다. 당직검사는 수배 사진과 많이 달라진 이근안의 신원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지문 검사를 하도록 했다.
1970년 경찰에 들어간 이근안은 1972년부터 1988년 잠적할 때까지 대공 분야에서 줄곧 근무했다. 악랄한 고문 기술자였던 이근안은 시국사건 관련자들을 무지막지하게 고문했다. 구타는 물론 물고문·전기고문·성기고문 등 최악의 고문을 자행했다.
군사정권 시절 고문원정 다니기도…16차례 표창
고문이 횡행하던 당시에도 ‘고문 출장’을 다닐 정도로 이근안은 고문에 있어선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당시 외부에 신원이 노출되지 않았던 이근안은 시국사건 관련자들에겐 ‘인간 백정’으로 통했다. 고(故)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 등 피해자만 수백 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됐다. 고문 피해자 일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고 다수는 평생 장애를 안게 됐다.
노태우정권 출범 후 전임 전두환정권과 차별화를 시도하며 고문수사관들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자 이근안은 1988년 12월 잠적했다. 이근안은 잠적 직후엔 대담하게도 김기춘 당시 검찰총장에게 “나는 김근태를 조사한 일조차 없다. 지금 출두해 여론 재판을 받고 싶지 않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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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적인 공분을 일으켰던 이근안이었지만 검경의 감시망은 허술하다 못해 사실상 전무했다. 수배기간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생활한 것은 물론 이사를 하거나 회갑잔치를 벌이기도 했으며 단 한 번도 검문을 당하지 않았다. 심지어 기차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당뇨병을 앓던 이근안은 아들을 시켜 지속적으로 약을 사 오도록 했다.
검경이 수년간 이근안을 전혀 찾지 못하자 당시에도 “못 잡는 것이 아니라 안 잡는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이근안에게 고문 피해를 당한 민주화 인사들이 직접 현상금을 걸고 이근안 검거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이근안은 자수서를 통해 “오랜 도피생활에 지쳤다”면서 “최근 동료들이 재판에서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받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안정됐다. 그래서 심경의 변화를 느꼈다”고 밝혔다.
성남지청에서 간단한 조사를 마친 이근안은 서울지검(현 서울중앙지검)에 압송됐다. 서울지검 앞에 대기하던 기자들이 심경을 묻자 이근안은 “죗값을 치루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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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도피생활로 이근안이 저지른 고문 범죄 대부분은 공소시효가 지난 상황이었다. 이근안은 오직 납북어부 김성학씨 고문 범죄에 대해서만 불법감금과 독직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숨어서 공부한 성경에 손을 얹고 깊이 반성하겠다”고 밝혔다.
이근안은 2000년 9월 대법원에서 징역 7년에 자격정지 7년이 확정된 후 2006년 11월 7일 만기출소했다. 출소 당시 이근안은 “사회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 그 시대엔 애국인 줄 알고 했는데 지금 보니 역적”이라고 참회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출소 2년 후엔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다.
목사가 된 이근안은 여러 인터뷰와 설교 등을 통해 자신의 반성이 거짓이라는 점을 스스로 입증했다.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닌 애국자”, “애국한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했는데 죄인 취급을 받아 억울하다”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했다. 또 “(전기고문 피해자들에게) 건전지 하나 들이대면서 겁을 줬더니 빌빌 거리더라”, “고문이 아닌 예술인 심문을 했다”고 피해자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근안의 황당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그는 2011년 12월 김근태 상임고문 사망 후엔 “김근태 본인은 나를 용서했다”는 거짓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근안의 거짓 주장을 계기로 목사직 안수에 대한 거센 반발이 나오자 결국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개혁 측은 이근안의 목사직을 박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