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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사였던 이후락은 긴장에 긴장을 거듭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변을 전혀 보장 받을 수 없던 이후락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독약인 청산가리를 미리 준비했다.
방북 첫날 안절부절못하며 평양의 호텔에 머물던 이후락을 북한 측 수행원이 찾아왔다. 밤중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수행원의 안내를 받으며 이동 중이던 이후락의 머릿속은 어지러웠다.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바로 주석궁이었다.
당시 이후락은 여차하면 삼키려고 오른쪽 주머니 안에 넣어 둔 청산가리 알약을 꽉 쥐고 있었다. 진땀을 빼며 악수에 성공한 이후락. 한밤중에 갑자기 불러내 이후락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한 북한의 술수에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후락도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김일성은 이후락을 ‘이 부장 선생’이라 부르며 평양까지 와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시했고, 이후락은 김일성을 ‘수상 각하’라고 불렀다. 이후 만찬에서 김일성은 이후락에게 1968년 북한 무장 게릴라들의 청와대 습격 시도였던 ‘1.21 사태’에 대해 사과했다.
그러면서도 김일성은 “이 부장 선생, 남반부에서는 왜 미 제국주의 군대를 붙잡아 두고 돌려보내지 않고 있소?”라며 이후락의 기선 제압을 위한 발언을 이어 간다. 그러자 이후락은 이에 굴하지 않고 “수상 각하, 한반도에서 물러난 미군을 다시 불러들인 게 누구입니까? 수상 아닙니까? 6.25 전쟁이 없었다면 왜 물러갔던 미군이 다시 들어왔겠습니까?”라고 당당히 대답한다. 김일성은 이후락의 예상치 못한 이 같은 대답을 듣고 크게 웃을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은 박 대통령의 의중을 확인하기 위해 같은 해 5월 29일 박성철 제2부수상을 서울로 보냈다. 상호 방문으로 최소한의 신뢰를 형성했다고 판단한 남북은 같은 해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7·4 남북 공동 성명’을 동시에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후락이 발표한 이 성명은 남북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 발표한 역사적인 공동 성명으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을 제시했다. 해당 성명은 데탕트라는 국제 정세와 맞물려 남북이 상호 간 적대 관계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길 전기로 기대를 모았으나 이후 북한의 잇따른 도발 등으로 휴지조각으로 전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