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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공간일까. 우선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고 멋진 건축을 만날 수 있다. 인류문명의 최정점을 찍은 거장들의 마스터피스를 보고 인간의 지혜와 감성에 탄복하게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을 찾고, 그 아름다움에 위안을 받고자 하는 것이 미술관을 찾는 중요한 이유다. 그러나 미술관이 아름다운 것을 보기 위한 공간만은 아니다. 인간의 지성·감성을 뽐내기 위한 공간만도 아니다. 그런 목적이라면 그토록 많은 돈과 인력을 쏟아부어 성전 같은 건축물을 짓고 수많은 전문가를 고용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미술관은 무엇을 하는 공간일까. 미술관은 문명사를 정리한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사물을 수집하고, 연구해 전시한다. 또 그 사물이 훼손되거나 파괴되지 않게 보존해 미래의 인류에게 축적된 지식으로 전달한다. 인간의 문화·역사는 말과 글로만 전달할 수 없을 만큼 복잡다단하다. ‘석굴암’의 불상이 얼마나 독창적이며,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 글로만 정리할 수 있을까. ‘분청사기’에 얽힌 구구절절한 사연을 구전민요로만 전달할 수 있을까.
인간의 문명사 정리하는 공간 ‘미술관’, 과연 합리적인가
하지만 미술관이 수집·연구·전시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라붙는 게 있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구조로 분류하고 체계화하는 일이다. 이미 근대부터 그랬다. 시대·장르별로 구분해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는 미술관이야말로 교육·계몽을 통한 유토피아적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미국의 사진작가 에드워드 스타이켄(1879∼1973)이 기획한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전설적인 전시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1955)이 좋은 예다.
2차대전 이후 팍스아메리카나가 제시한 사회 모습을 잘 정리한 이 전시에서 스타이켄은 사진을 통해 사람이 겪는 공통적인 경험과 감정을 끌어내 보편적인 근대사회의 인간을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19세기 발명한 이래 예술과 기록, 상업 사이에서 애매하게 떠돌던 사진이란 장르를 당당히 회화를 대체할 예술로서 미술관에 입성시켰다.
그렇다면 미술관의 분류체계는 얼마나 합리적일까. 가령 한반도 청동기시대 무구 중 하나인 청동방울이 있다고 치자. 만약 당신이 큐레이터라면 미술관 어디에 놓겠는가. 아마 거리낌 없이 ‘청동을 재료로 한 도구’란 곳에, 또 ‘한국’이란 국가의 하위장르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방울은 만들어졌을 당시 제사장만 쓸 수 있던 신성한 물건이다. 청동으로 만든 무기·화로와 섞일 수 있는 아무것이 아니다. 게다가 청동방울은 제사장이 흔들 때만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발휘한다. 청동방울이 본래 기능인 ‘신령함’을 잃는다면 아무리 합리적인 설명이 따라붙는다고 한들 반쪽짜리 진실에 불과할 것이다. 더구나 ‘한국’이란 섹션은 당시 관점에서 보자면 허구에 불과하다. 한반도에 살던 청동기인들은 국가란 개념조차 없었다. 근대 미술관의 맹점은 아이러니하게도 지식의 보편성과 합리성을 맹신할 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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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윌슨(68)의 전시이자 작업인 ‘미술관 발굴하기’(Mining the Museum·1992)는 이러한 통찰에서 출발했다. 미국 볼티모어의 매릴랜드역사학회(Maryland Historic Society) 미술관의 소장품을 재배치하는 과정에서 그는 미술관이 정리한 문화와 문명사가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차 있는지, 얼마나 지배계층(주로 백인)의 목소리만을 담고 있는지 고발하고자 했다.
여느 미술관 해오던 것과 다른 전시로 ‘새로운 역사’ 발굴
윌슨은 뉴욕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스스로의 정체성을 아프리카, 원주민, 유럽인이 섞인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혼종에서 찾는다. 물론 자신의 정체성을 현재의 미국 국적, 작가에 두기도 하지만, 유색인종으로 미국땅에 정착하기까지 선조가 겪어온 역사 속에서 형성된 유서깊은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바로 그 ‘역사적 정체성’에 기반해 여느 미술관이 해오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발굴하고자 했던 것이다.
1844년 개관한 매릴랜드역사학회 미술관은 미국 역사를 대표하는 오브제와 작품을 수집해 소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식민지시기나 노예제 등과 관련한 유물이 대표적이다. 윌슨은 전시를 앞두고 몇개월에 걸쳐 뉴욕과 볼티모어를 기차로 왕복하며 미술관의 유물을 상세히 관찰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처음에는 유물을 보기 위해, 이후에는 그 유물을 매일 다루고 분류하는 큐레이터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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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 결과물이 어떻게 나왔을까. 윌슨은 관람객에게 의도적으로 충격을 줄 수 있는 전시를 선보이게 된다. 그 유명한 ‘메탈 워크’(Metal Work)란 작업은 거기서 나왔다. 똑같은 금속 소재의 유물이지만 용도가 판이하게 다른 두 가지를 한 좌대에 배치한 것인데, 바로 부유한 백인지배층이 사용하던 ‘은으로 만든 식기류’와 흑인노예층이 차고 있던 ‘족쇄’다. 같은 시대에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던 이들의 사물을 한 데 놓아 미국이 누렸던 번영의 대가를 질문한 것이다. ‘캐비닛 메이킹’(Cabinet Making)도 마찬가지다. 고풍스러운 안락의자와 노예를 채찍질했던 도구를 함께 배치해 당시를 상상하도록 했다.
또 다른 조각상 전시도 다르지 않다. 미국 역사에서 왜곡되고 뒤틀리게 묘사돼 온 원주민을 세운 나무조각상은 아예 관람객에게 등을 보이고 서 있다. 이들 뒷모습 사이사이로 관람객이 마주할 수 있는 것은 벽에 걸린 원주민 후손의 실제 사진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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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전시, 관람객에게 새로운 의무를 부여하다
이런 전시를 통해 윌슨은 무엇을 전달하고 싶었을까. 그는 “누구든 전시를 보고 현실에서 뭔가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만큼 윌슨은 그가 사는 시대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고 그 진단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전시를 개막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흑인 로드니 킹을 백인경찰이 과잉제압한 사건에서 발단한 ‘LA폭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술관 발굴하기’ 전은 5만 5000명이 넘는 관람객을 이끌며 대성공을 거뒀고, 미국미술관협회는 이 전시를 ‘올해의 전시’로 선정하고(1993), 윌슨에게 큐레이터협회상을 수여하기도 했다. 수상 이유는 “미술관에 부여되는 새로운 시대적인 요청, 역사 다시쓰기”를 해냈다는 것이었다.
미술사가 손꼽는 성공적인 전시였다. 하지만 애초 전시가 의도했던 만큼 세상이 변했는지는 의문스럽다. 여전히 차별과 억압은 존재하며, 미술관은 지배자의 담론을 즐겨 차용하기도 한다. 다만 한 가지 성과가 있다면, 1990년대 윌슨이 제기한 이 대담한 문제의식이 현재 대부분 근현대미술관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어젠다가 됐다는 것이다. 미술관은 아름다운 공간에 세련된 전시를 내놓으면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의 논리에 의문을 품고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이는 미술관 전시를 찾는 관람객에게도 똑같이 부여된 새로운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