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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천장이 높고 넓은 홀. 제법 규모 있는 미술관처럼 보인다. 걸린 작품 수가 이미 적잖은데, 액자를 들고 나르는 ‘작업자’까지 바쁘다. 그런데 여기가 어딘가. RA라니 영국 왕립예술원(Royal Academy of Arts)에서 전시라도 연 건가. 그러고 보니 RA의 상징이라 할 푸른 기둥의 아치문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말이다. 관람객들 저 안쪽으로 자리를 잡고 퍼져 앉은 두 남자가 ‘거슬린다’. 현장스케치려니 이제껏 봤던 장면에 의심이 생기는 거다. 그러고 보니 작품 속에 건 그림들이 대단히 친밀하다. 얼핏 ‘태조 어진’까지 보이니 말이다.
서울 성동구 서울숲길 아뜰리에아키가 올해 첫 전시로 기획한 ‘뱅가드’(Vanguard) 전. 유리문 너머 전시장 분위기는 쇼윈도에 걸린 이 작품 한 점이 가름해버렸다. 존 쿡의 ‘존 쿡’(2020)이다.
해외작가인가 싶은 이름 존 쿡은, 사실 ‘따로 또 같이’를 지향하는 두 작가가 의기투합한 그룹명이다. 김성국(40)과 김시종(39), 여기 ‘뱅가드 전’에 개인으로도 참여한 작가들은 혹여 헷갈릴까, 갤러리 입구 저 현란한 작품 안에 아예 선명하게 박아뒀더랬다. ‘John Cook’(존 쿡)이라고. 그렇다면 작품 속에 퍼져 앉은 두 남자는 자신들이고, 작품은 그들의 ‘희망 전시’쯤 되는 건가.
사실 두 작가에게 RA는 꿈의 무대다. 250년 역사의 왕립예술원은 영국 출신 젊은 작가에게도 넘보기 힘든 곳이니. 그래도 그렇지. ‘태조 어진’도 모자라 이번 ‘뱅가드’ 전에 건 전시작으로 작품을 도배했단 말인가. 어쨌든 상황을 읽고 작품을 다시 보면 슬쩍 웃음이 삐져나올 수밖에. 누구든 깜박 속을 뻔한 ‘현실적 이상향’을 모두에게 공표하듯 떡하니 들이댔으니. 그것도 현실보다 더 적극적이고 더 정교하게.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군’ 대표하는 자격
“감히 탐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림’에선 가능하지 않겠나.” 왜 아니겠나. 모든 화가의 바람이 그랬고, 또 그림이란 게 원래 그렇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수없는 ‘신화’며 ‘성화’며 ‘무릉도원도’가 괜히 나왔겠는가. 어디엔가 그들이, 그곳이 있을 거란 확신, 아니 그보단 들끓는 기대감이 아니겠나. ‘뱅가드’ 전은 그런 기대감을 품은 신진작가들의 야심 찬 선언식인 셈이다. 전위·선봉·선도·선구란 뜻의 ‘뱅가드’ 전에 나선 작가는 김성국과 김시종, 존 쿡 외에 김용오(36), 임현정(35), 정수영(35), 정인혜(32). 왕성하게 붓질 중인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군’을 대표하는 자격이다. 소재와 주제, 색채와 구성 등 뭐든 튀고 보는 평면작품 25점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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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용오의 무기는 ‘사람’이다. 마치 만화경에 차례로 등장할 법한 사람의 초상을, 또 그들을 모아둔 이벤트 현장을 옮겨놓는데. 팝아트처럼 가볍고 단순해도 작가가 그린 모두는 실존인물이란다. 덕분에 인종과 지역을 따지지 않는 인물군은 작가의 자산이 됐을 터. 빨간 배경에 분홍 얼굴(‘홍콩여자’ 2016), 노란 배경에 푸른 얼굴(‘글로리’ 2015) 등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가만의 또렷하고 화려한 색감이 장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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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현정은 현실과 초현실을 교묘히 섞어 ‘작가만의 전경’을 만들어낸다. 기억에서 끄집어내고 경험을 붙인 장면을 두곤 ‘내면의 풍경’이라고 했는데, 차라리 ‘내면의 동화’라는 편이 적절할 듯하다. 원시향 물씬 풍기는 광경 앞에서 자꾸 얘깃거리를 찾게 되니 말이다. 가로·세로 232.5×133.3㎝로 확장한 ‘드림 하와이’(2021)라면 설명이 될 듯하다. 캔버스에 그린 ‘윌리를 찾아서’인 듯 놓칠 수 없는 디테일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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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에 가지런히 사물을 늘어놓는 작가 정수영은 누가 봐도 ‘정물파’다. 3층 선반에 층층이 화분을 놓고 지구본을 들이고 거울도 세우고 ‘마블’ 잡지까지 올리거나(‘브레인워시드’ 2022), 온갖 아이스크림 통을 죽 세워 포즈를 취하게(‘선택의 전부 4’ 2021) 했다. 하지만 작가는 ‘정물화가’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눈치다. “정물 하나하나를 인물로 생각한다”는 거다. 그 설명 끝이라면 전부 달리 보인다. 아이스크림 통조차 무대에 세운 합창단원인 듯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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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그리는 화가는 많지만 선인장을 좇는 화가는 드물다. 그 드문 일을 작가 정인혜가 한다. 수없이 매달린 선인장의 초록잎(사실 줄기라고 하는) 중 같은 모양, 같은 색이 하나도 없다는 게 작가의 기량을 대신 말해준다. 울퉁불퉁 가시가 박힌 자칫 험악할 장면을, 보고만 있어도 숨통이 틔는 청량한 자연스러움으로 치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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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쿡의 한쪽인 작가 김성국이 즐겨 하는 작업은 세상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다시 시각화하는 거란다. 덕분에 익숙하지만 낯선 화면이 수시로 튀어나오는데, 명화든 신화든 ‘많이 본’ 장면에 더한 작가의 붓터치가 새로운 장면을 뽑아내기 때문이다. 뿌옇게 안개를 씌운 듯한 ‘아이보리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2021)의 신비감을 본다면 그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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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쿡은 김성국의 페인팅과 김시종의 사진이란 두 강점을 묶어낸 셈. 디지털 콜라주한 이미지를 프린트하고 붓질을 얹어 원화로 만들거나, 여기에 다시 콜라주해 프린트하는, 복합반복적 작업으로 세상에 없는 세상을 쌓아낸다.
소재·주제, 색채·구성… 뭐든 튀지만 밀도 높아
‘뱅가드’ 전에 나선 6인의 작가와 1개의 팀,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분방한 구상에 자유로운 표현, 그럼에도 탄탄한 기본기를 얹은 붓이 함부로 나대지 않게 하는, 밀도 높은 화면에 있다. 실험과 장르를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무장했지만 부드럽고 친밀해 공격보단 화해를 택한 듯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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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에게서 한국화단의 허리가 될 ‘될성부른 작가’를 보는 건 비단 작품성 때문만은 아니다. 사실 다른 기대감이 있는데. 개관 이후 12년, 아뜰리에아키가 그간 뽑아 소개하고 또 거쳐간 젊은 작가 중에는 국내외 미술시장을 들었다놨다하며 단단한 중견 대열에 들어선 이들이 적잖아서다. ‘동구리’를 창조해낸 권기수(50), 지난해 ‘경매스타’에서 ‘억대 작가’로 올라선 우국원(46), 왼손과 오른손으로 다른 화풍을 구현하는 윤상윤(44) 등을 앞세워 강예신(46), 정성준(41), 채지민(39), 권능(32), 콰야(31) 등등 이름만 걸어도 국내·해외의 아트페어를 바쁘게 만드는 작가가 줄줄이다.
‘뱅가드’ 전에 건 작품들의 가격은 100호 기준 1000만원 미만. 이제 막 시장의 반응을 가늠하는 중이라지만, 최근 미친 듯 타오른 미술시장의 가격경쟁을 봐왔던 터라 그 작품가가 되레 신기할 정도다. 역시 좋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비슷한 건지 전시작 25점 중 20점 이상이 이미 팔려나갔단다. 전시는 3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