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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늘도 그들은 뛴다. 움직이는 기계 앞에서 헉헉대는 중이다. 저들이 죽자고 뛰는 헬스클럽의 커다란 통창 밖 이쪽 세상에서 볼 땐 심경이 복잡하다. “저 사람들, 참 힘들게 사는구나.” “그런데 오래 살긴 하겠다.” 그래서 누군가 다가가 물었다. “왜 그리 미친 듯이 뜁니까?” 그런데 참 엉뚱한 대답이 돌아온다. “내가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게 몸이니까요.” 내막은 이렇다. 사회나 국가, 취업이나 결혼 등 수많은 요소에서 좌절하다 보니 의지할 건 자신밖에 없더라는, 내 몸과 마음뿐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는 소리다.
이 가상사례는 앞으로 전개할 저자의 심오한 ‘배신’ 시나리오에 근거한다. 사회비평가로,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활동해온 저자는 ‘배신 시리즈’의 저술로 유명하다. 전작 ‘노동의 배신’(2001), ‘희망의 배신’(2005), ‘긍정의 배신’(2009)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국내 독자에게도 이름을 알렸다. 현대사회가 뿌려놓은 각종 신화를 무참히 깨버리는 작업으로 어느덧 ‘건강의 배신’에까지 온 거다.
책에는 세상에 배신당할 일이 넘치는데 ‘내 몸뚱이’ 지키는 일에서까지 배신당해야 하는가란 냉소가 질펀하다. 그중 하나가 ‘수명연장의 꿈’이다. 쉬고 먹고 싶은 본능을 억제하고 자기절제만 잘하면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는 약속. 사실 여기에는 ‘노화’에 대한 부정성이 깔려 있다. 노화는 막아야 할 적이고 병이며, 젊음만이 완벽한 인생을 만든다는 그것. 헬스케어니 웰니스(웰빙·해피니스·헬스의 합성어)니 하는 산업이 불황을 모르고 뻗쳐나가는 이유기도 하다. 건강과 장수를 향한 강박적인 집착을 부추기는 거다. 의료계도 예외는 아니다. 건강검진을 앞세운 현대의학에 맹렬히 충성하고, 질병 없이 오래 살게 한다는 예방의학을 보조시행령쯤으로 여기게 한다.
저자의 문제제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언제부터 생로병사가 불편한 진실이 돼 버렸느냐는 거다. 이를 밝히기 위해 저자는 현장을 들쑤시고 다녔다. 헬스클럽·피트니스센터를 찾아다니며 ‘안티에이징’이란 프로그램의 실효성을 따졌다. 실리콘밸리로 가선 바이오해킹 산업이 주도한 ‘마음 근육 단련’이 진짜인가를 캐묻는다. 한마디로 그들이 말하는, 몸이든 마음이든 자의적으로 통제하는 일이 가능한가를 추궁한 거다.
저자가 심하게 딴죽을 건 상대는 ‘거대산업’이다. 의료계와 헬스케어, 실리콘밸리 등. 우선 의료계의 과잉 검사·검진을 꼬집는다. 멀쩡한 사람을 건강염려증에 시달리게 한 그것은 ‘이윤’ 때문이란다. ‘건강한 환자’를 상대로 돈 벌 방법이, 죽을 때까지 멈춰선 안 된다고 윽박지르는 검사·검진뿐이니까. 한 번에 끝낸다면 그나마 다행일 터. 왕왕 ‘추가’ 검사·검진도 따라붙는다. 뭔가 잘 안 보인다,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 등으로. 그렇게 ‘추가’에까지 돈을 쓴 환자에게 “아무 일 없더라”는 결과를 말한다면 과연 그들이 ‘과잉진료’라고 화를 낼까. 천만에. 그저 무탈한 걸 고마워할 거다. 돌아오는 길에 다음 검사·검진일을 예약하는 일도 잊지 않고.
현대의학이 걸핏하면 들이대는 ‘증거’를 따지며 저자는 이런 반증을 내놓는다. ‘유방조영검사’를 통한 유방암 조기 발견이 5년 생존율을 급격히 줄인 건 맞단다. 그렇다고 정기적으로 검사를 받은 덕에 유방암 사망률이 현저히 떨어졌다는 증거는 없지 않느냐는 거다. 검진에서 찾아냈다는, 의사가 치료하겠다고 덤벼든 작은 점조차 본격적인 암으로 진행하지 않는 비활성 상태일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비난은 이내 피트니스·웰니스산업으로 튀는데. ‘나이를 거스르는’ 사탕발림에서 나아가 ‘나이를 되돌려주겠다’고 사기를 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는 거다. 그러니 헬스장이 갈수록 ‘전투적’이 돼갈 수밖에. “어쨌든 달리세요. 달릴 수 없으면 걷고.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구호 같지 않은가. 예전 공장노동자를 향한 작업감독의 어투, 바로 그거다. “계속 움직이지 않으면 퇴보한다!”고 다그쳐 댔던. 결국 언제부턴가 운동은 노동이 됐고, 헬스장은 노동자의 일터가 된 거고. 하지만 어쩌랴. 이 ‘생쇼’를 하고도 이제껏 노화를 되돌리는 피트니스와 다이어트 비법은 찾아내지 못했으니.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단 환상
사실 우리가 세뇌를 당해온 신념이 하나 있다. ‘사람 일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마음이 튼튼해야 몸이 건강하다’ 등. 이 모두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몰아갈 순 없다. 일정 부분 마음에 빚을 지기도 했으니까. 그렇다고 몸과 마음을 컨트롤할 수 있단 행위로 돈벌이 삼아선 곤란하다는 거다. 제대로 검증하지도 않은 잣대를 들이대며. 어차피 노화의 치료법은 “없다”는 게 저자의 결론이니까.
건강을 향한 불타는 의지, 늙지 않는 실용적 지침 등을 바랐다면 책은 별로 줄 게 없다. ‘배신’ 시리즈가 아닌가. 진을 빼는 운동, 굶주리는 다이어트, 때마다 컨베이어벨트처럼 돌리는 건강검진. 그 어떤 것도 젊음이나 무병장수를 보장할 수 없다고 발등을 찍으니.
막바지까지 일사천리로 흘린 저자의 논지에서 절정은 ‘죽음을 어찌 볼 건가’에 닿아있다. 죽기에 충분한 나이가 됐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성취”라는 확신에서다. 이 성취를 ‘의료화한 삶’에 이어 ‘의료화한 죽음’으로 덮어씌우는 게 정말 당신이 원하는 일인가를 묻고 있는 거다. 죽음은 삶의 비극적 중단이 아니란다. 그걸 늦추겠다고 아등바등 난리칠 건 더욱 아니고.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일을 그저 “살아 있는 세상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짧은 기회”쯤으로 보자고 한다. 그게 자연스럽다고. 피트니스든 웰니스든 강박적인 추구로는 삶과 죽음의 간격을 한없이 벌려놓을 뿐이란 행간이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