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습니다"…이라크 땅에서 울부짖던 30대 한국인[그해 오늘]

2004년 이슬람 무장단체 피랍 김선일씨 영상 공개
무장단체 24시간 내 철군 요구…거부되자 김씨 살해
소속 회사, 정부에 알리지 않고 자체 협상하다 지체
  • 등록 2023-06-21 오전 12:01:00

    수정 2023-06-21 오전 12:01:00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2004년 6월 21일. 한국 시간 기준 새벽 시간. 카타르 위성방송인 알자리라는 이라크 무장세력에 피랍된 한국인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방송했다.

미군 군납업체인 가나무역 소속 한국인 김선일(당시 34세)씨였다. 김씨는 영상에서 영어로 “한국 군인들! 제발 여기를 떠나세요.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당신의 생명은 소중하고, 제 생명도 소중합니다”라고 말을 했다.

김선일씨 사망 직후인 2004년 6월 28일 서울대학교 입구에서 학생들이 이라크 파병반대 및 고 김선일씨 추모 삼보일배 행진을 하려고 교문 밖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슬람 무장단체 소속 납치범 일당 중 한 명은 영상에서 “한국정부와 한국인에게 메시지를 보낸다”며 “우리는 한국군이 이 땅에서 철군하기를 원한다. 더 이상 이 땅에 군대를 보내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이 한국인의 머리를 보낼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철군에 24시간을 준다고 밝혔다.

해당 영상이 담긴 비디오테이프는 현지시간 방송 당일인 20일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는 알자리라 사무실로 배달된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긴급회의를 소집해 대책마련에 착수했다. 정부는 철군 요구를 거부하고, 이라크 재건 지원을 위한 파병방침을 재확인하는 한편, 김씨의 석방을 위해 무장단체와의 협상 등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외교통상부는 당일 주한 중동국 대사들을 불러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죽기 직전까지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호소

다음날 무장단체가 김씨 석방 의사를 표명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으나, 김씨는 한국시간 22일 밤 10시 20분(이라크 현지시간 오후 5시 20분) 바그다드에서 약 35㎞ 떨어진 팔루자 인근 도로변에서 순찰 중이던 미군에 의해 시신으로 발견됐다. 시신은 참수된 상태였다.

미군은 우리 군당국에 ‘동양인 시신 발견’ 사실을 즉각 통보했다. 그 이후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은 한국시간 23일 0시 45분 이메일로 송부된 사진이 김씨라고 확인했다. 김씨 시신은 다국적군 병원에 안치됐다가 같은 달 26일 군 수송기를 통해 한국에 도착했다.

무장단체가 이후 공개한 영상에서 김씨는 사망 직전 당시 대통령을 향해 “저는 살고 싶다.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 제발, 이라크에 한국 군인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드을 말하며 울부짖었다.

당시는 이라크 무장세력들이 외국인들을 무차별적 납치가 잇따라 벌어지던 시기였다. 피랍된 외국인들 중엔 풀려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잔혹하게 살해되는 경우도 많았다. 사건 발생 약 두 달 전, 한국인 목사 7명도 무장세력에 납치됐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외교통상부 조사 결과, 김씨는 5월 31일 오후 이라크인 직원 1명과 함께 트럭을 타고 물건을 배달하기 위해 팔루자 지역으로 향하던 중 이곳에서 무장단체에 납치됐다. 가나무역 사장은 김씨와 연락이 닿지 않자 외교부에 신고하는 대신, 경찰서와 병원 등지를 뒤졌다. 김씨가 교통사고가 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6월 12일 무렵 피랍 사실을 확인한 후에도 외교부에 이를 알리지 않았다.

외교부, 6월초 ‘납치된 한국인 있나’ 문의받고도 몰라

가나무역 측은 김씨의 피랍 사실을 확인한 후 자체적으로 현지 변호사를 선임해 무장단체와의 석방협상을 진행했다. 이때까지도 우리 정부에 피랍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던 중 김씨의 피랍 상황을 담인 방송이 현지시간 20일 밤 알자리라를 통해 보도됐다.

가나무역 사장은 김씨가 피랍되고 알자리라 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을 방문했으나 피랍 사실에 대해 일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는 김씨 피랍사실이 확인된 이후에도 김씨의 피랍 시점에 대해 수차례 말을 바꾸기도 했다. 가나무역 측이 외교부에 피랍 사실을 미리 알렸다면 정부 차원이 더 빠른 대처가 가능했을 상황이었다.

AP 통신은 24일 “6월 초 피랍된 김씨가 나오는 비디오테이프를 배달받은 후, 외교부에 영상 속 김씨 신원 및 피랍 사실 여부 등을 문의했으나 ‘한국인 피랍 보고를 받지 못했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당시 억류 여부가 불분명해 결국 해당 비디오테이프를 방영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이 같은 상황을 보도한 당일, 해당 영상을 공개했다. 피랍 직후에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영상에는 김씨가 깔끔한 모습으로, 침착하게 납치범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이 담겼다. 이 영상 속에서 김씨는 이름, 생년월일, 직업, 이라크에 온 시점 등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AP통신이 논란이 계속되자, “서울지국 기자가 6월 3일 김선일이라는 이름의 한국인이 이라크에서 실종됐는지 여부를 외교부에 전화로 문의했으나, 테이프 존재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인이 실종됐는지 여부를 단독으로 확인하기 위해 비디오테이프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외교부에 전달했다.

또 “문의를 받은 외교부 관계자는 김선일이라는 사람 등 어떤 한국인도 실종되거나 체포됐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비디오 테이프는 6월 초 바그다드에 있는 APTN(AP통신 TV계열사)으로 배달됐다. 비디오테이프에는 김씨가 납치됐거나 그의 의사에 반해 억류돼 있다는 그 어떤 표시도 없었다”고 덧붙였다.

외교부 측은 AP 측으로부터 문의를 받은 후에도 이를 주이라크 한국대사관에 확인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유족은 이후 “정부가 재외국민 보호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며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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