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싼 車 엔진 단 유람선 해상 화재...35명 사망·실종[그해 오늘]

1987년 6월 16일, 관광객 태운 극동호 해금강 인근 해역서 화재
승객들 필사의 대피로 바다 뛰어들었지만 27명 사망·8명 실종
비싼 선박용 엔진 대신 폐차된 버스 엔진 사용·탈출 안내도 없어
6년 뒤 운항 정지 명령 등 관련 국가 '부작위' 책임 인정
  • 등록 2023-06-16 오전 12:03:00

    수정 2023-06-16 오전 12:03:00

[이데일리 이연호 기자]한려해상국립공원의 대표 절경 중 하나인 거제도 해금강 인근 해상에서 갑자기 선박에 불이 났다. 승객들이 대피할 곳이라곤 시커먼 바닷속밖엔 없었다. 예고된 인재(人災)로 결론난 이 화재로 약 30명의 관광객이 목숨을 잃었다.

사진=당시 KBS 방송 화면.
1987년 6월 16일 오후 2시 40분께, 경남 거제군(현 거제시) 남부면 다포리(속칭 ‘솥뚜껑’)해상에서 승객 83명, 승무원 3명(선장 1명 포함) 총 86명을 태우고 해금강에서 충무(현 통영)로 돌아가던 충무유람선협회 소속 목조 유람선 24톤급 ‘극동호’ 선체에 갑자기 불꽃이 튀었다.

순식간에 객실로 불이 번지자 승객들은 우왕좌왕 서둘러 바다로 뛰어들었다. 구명동의는 발화 지점인 기관실 위쪽 마루에 밧줄로 꽁꽁 묶여 있었고, 승객들은 승선 시 구조 장비 이용 방법 및 비상 탈출 요령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듣지 못했다. 소화기조차 작동하지 않아 화재 진압을 위한 초동 조치조차 기대할 수 없었다.

승객들이 바다로 필사의 대피를 하고 약 10분 후 배는 완전히 침몰했다. 인근에서 조업 중이던 어선 2척과 신고를 받고 출동한 해경·해군 경비정이 즉각 구조 작업에 나섰으나 86명 중 27명이 숨지고 8명이 실종됐다. 사고 해역은 물살이 세 제한된 시간에 한정된 인력으로 펼친 구조 작업은 역부족이었다.

구조된 51명 중 절반 이상이 화상 등으로 인한 중경상을 입었다. 승객들은 남원과 대구의 단체 관광객들로 부녀자가 대부분이었다. 모처럼 수려한 경관을 보며 힐링한 대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생존한 선장과 선원들을 구속하며 수사에 나선 경찰은 극동호가 출발 후 세 번이나 엔진이 꺼져 선원들이 엔진 뚜껑을 열고 수리했다는 생존 승객들의 진술을 확보했다. 수사 결과 1979년 1월 건조된 극동호가 당시 사용한 엔진은 중고 자동차 부속 상회에서 사들인 노후화된 자동차 엔진이었다.

해수(海水)로 냉각하는 선박용 엔진 대신 청수(淸水)로 냉각하는 자동차 엔진을 배에 달면 쉽게 부식돼 2~3년을 견디기 힘들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이 당시 제기됐다. 당시 연안 여객선이나 어선들은 마력당 6~8만 원씩 하던 비싼 선박용 엔진 사용을 꺼리고 대부분 값싼 자동차 엔진을 사용했다. 극동호에 불법 설치된 엔진은 1971년 폐차된 고속버스에서 적출한 엔진이었다.

극동호 승무원들은 승선 당시 승객들에게 비상 탈출 요령을 설명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긴급 구조를 요청할 무전 시설과 항로 보고를 위한 통신 시설을 갖추고도 당황한 나머지 이를 사용하지 못하며 화를 키웠다. 게다가 기관사는 무자격자였다. 사고 발생 3달 전엔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선박 검사에서 극동호의 성능이 좋지 않다고 판단해 하루 1시간 30분만 운항토록 조치했으나 이를 어기고 충무에서 해금강까지 하루 4~8시간 운항하기도 했다.

극동호 화재 사건은 수습 후에도 한동안 논란이 지속됐다. 이 배가 인명 보험을 들지 않아 사망자에 대한 보험 처리 문제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결국 이 일은 소송으로 번졌는데, 1993년 대법원은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공무원들이 극동호 수선, 사용 및 운항 제한, 운항 정지 명령을 행사하지 않은 부작위에 대해 책임이 있다는 판결이었다.

결국 극동호 화재는 안전 검사 부실, 운항 시간 초과, 승객 안전 수칙 미준수, 관계 당국의 허술한 관리 등 인재(人災)의 종합 세트였던 셈이다. 이로 인해 수십 명의 가슴 속에 평생의 추억으로 남았어야 할 해금강 관광길이 한없이 원통한 저승길이 되고 말았다.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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