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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푸르디푸르러 창백한 보랏빛을 띤 뾰족한 봉우리들이 일제히 솟구친다. 저 멀리 운무에 가린 산세는 아득하기만 한데, 뭉실한 소나무 군락은 내민 손에 잡힐 듯 가깝다. 꿈같이 아스라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인 풍경. 그래, 이곳이 금강산이구나.
그날, 이 그림은 유난히 빛났다. 17년간 어두운 작업실 창고에 묻혀 있다가 비로소 세상에 나와 받은 첫 조명은 너무 강렬했다. 이 그림을 배경으로 남북 두 정상이 나란히 서서 호쾌한 웃음을 날렸고, 이 그림을 배경으로 마주 앉아 ‘평양냉면’ 얘기부터 꺼냈으니. 지난 4·27 남북정상회담 때 판문점 평화의집 회담장에 건 가로 681㎝ 세로 181㎝의 대작.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2001) 얘기다.
작가 신장식(59·국민대 교수)을 최근 만났다. 얼추 다섯 달. 롤러코스터를 탄 그간의 정국에 이젠 좀 무뎌졌을 법도 한데, 신 작가는 여전히 감격스럽단다. “남북 두 정상이 나란히 서고 앉은 그곳에 걸린 그림 덕에 희망을 찾았다”고 말한다. 금강산 비로봉 동쪽 구룡대 아래. 화강암으로 된 계곡에는 크고 작은 못들이 층층이 들어서 있다는데. ‘상팔담’은 그중 가장 큰 못 여덟 개. 그림은 바로 그 지점에서 마주한 금강산 전경이다.
‘누구의 주제련가 맑고 고운 산….’ 수수만년을 지켜왔다는 금강산으로 향하는 길을 이제 알려주려나.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은 아직 판문점 평화의집 그 자리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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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넘는 아리랑고개가 금강산”
25년간 금강산에만 빠져 살았다. 붓 잡고 바로 시작한 그림은 아니었다. 출발은 아리랑이라 했다. 서울대 회화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얼마 뒤, 1988 서울올림픽에서 개·폐회식 미술조감독을 맡으며 ‘청사초롱’ 퍼포먼스를 디자인한 게 계기였다. 그 장면을 제작한 판화로 이듬해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까지 받자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청사초롱도 현대미술에서 먹히는구나.” 민속적 소재를 풀어내는 일은 이후 그의 과업이 됐다. 그러던 중 발굴한 것이 아리랑이고, 그 조형언어가 금강산이었던 거다. “한반도에서 가장 큰 문제가 분단이고 가장 큰 고개는 휴전선이 아닌가. 난 그 휴전선을 마지막으로 넘는 아리랑고개가 금강산이라고 생각한다. 아리랑고개를 넘어서려는 민족의 의지, 생동감까지 제대로 얘기해보자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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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금강산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조선 순종이 집무실에 두고 싶다고 해강 김규진에게 요청해 그렸다는 ‘금강산총석정절경도’를 비롯해 수많은 금강산 그림에 몰두한 건 물론이고 각종 고문헌자료까지 섭렵했다. 그렇게 2년 남짓, 1993년 금강산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하지만 아쉬움이 컸다. 눈으로 발로 보지 않은 그림은 ‘관념산수’에 가까웠던 터.
그런 그에게 금강산을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98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의 소떼방북 덕에 열린 금강산 유람에 나선 거다. 이후 2008년 관광길이 다시 닫힐 때까지 10년간 계절별로 10여 차례 금강산을 다녀왔다. 관념산수가 점차 ‘실경산수’로 변해갔다.
△관념산수가 실경산수로 변하기까지
‘금강산 화가’가 된 이래 개인전만 20여 차례. 최근 여기에 한 회를 더 보탰다. 서울 중구 소공로 금산갤러리에 펼친 ‘금강 12경’ 전(28일까지)이다. 비로봉·내금강·만물상·옥류동 등 열두 달별로 색과 모양을 달리한 금강산을 들여다본 신작 25점을 걸었다. 계절이 무색한 작품도 눈에 띈다. 만물상이 머금은 짙은 녹음을 뽑아낸 가로 291㎝의 ‘금강산 만물상의 빛’(2018), 눈 덮인 겨울을 역시 같은 크기로 그린 ‘개골산 비로봉’(2018). 여기에 금강산에서 본 백두대간, 백두대간서 본 금강산을 나란히 걸어 의미를 찾은 ‘백두대간의 겨울’(2018)과 ‘백두대간 금강산’(2018)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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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집 지키고 있는 ‘상팔담’…“무료 임대 중”
‘상팔담에서 본 금강산’이 판문점으로 간다는 건 4·27 남북정상회담 2주 전쯤 알았단다. 국정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평화의집에 걸려고 하니 빌려달라고 하더라. 그런데 누가 사기를 치는지 믿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계약서를 쓰라고 했다.” 며칠 뒤 진짜 국정원에서 찾아왔더란다. 그러곤 계약서를 쓰고 그림을 가져갔다. 2주간 임대하는 조건이었다. “로비쯤에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회담장에 걸린 건 나도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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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이 끝난 뒤 그림은 어찌 됐을까. “국정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북미정상회담이 판문점서 또 열릴 수도 있으니 좀 더 빌리자고. 그런데 돈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연말까지 그냥 빌려주겠다고 했다.” 껄껄 호쾌하게 웃어젖히는 신 작가의 표정에는 작품에 대한 자부심,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묘하게 겹쳐 스친다.
“금강산의 기운이 한반도의 평화를 가져오길 바란다. 한반도의 등줄기는 백두대간이고, 백두대간의 꽃은 금강산이 아니던가.” 그 바람을 탔을까. 남북정상회담이 다시 열린다. 이번 장소는 평양이라니 신 작가의 그림을 한번 더 보긴 어렵게 됐다. 하지만 그이의 금강산은 정말 마지막 아리랑고개가 될 모양이다. 남쪽 일행이 결국 판문점에 걸린 그림을 넘어 북쪽으로 향한다고 하질 않은가. 금강산이 저만치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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