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형근의 ‘청다색’(Umber-Blue·1978). 길이 270㎝ 폭 141㎝에 달하는 작품은 마포에 블루와 엄버를 섞은 물감을 수십번 덧칠해 완성했다. 네덜란드 한 개인이 소장한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연 ‘윤형근 회고전’을 위해 빌려왔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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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엽서 한 통이 빚은 오래된 장면 한 토막을 들여다보자. “살자면 별 병도 생기나 보다. 한 3년 견뎌왔는데 결국은 병원에 들어와서 나흘째 된다. 휴양하는 것도 같고 고문을 당하는 것도 같고 창밖으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 병원의 식사는 훌륭해서 좋다. 걱정들 말라. 수화”(1974년 7월 10일).
수화 김환기(1913∼1974)는 이 엽서를 띄우고 보름 뒤 세상을 떴다. 61세 여름의 미국 뉴욕. 급작스러운 뇌출혈이었다. 그렇다면 이 엽서는 누구에게 향했던 건가.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사위에게 보낸 거였다. 큰딸 김영숙과 결혼한 그의 제자 윤형근(1928∼2007). 엽서가 먼저였는지 부음이 먼저였는지. 윤형근은 이렇게 회고했다. “너무나 불쌍하고 뭔지 모르게 한없이 원통해서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
| 수화 김환기가 1974년 7월 10일 타계 보름 전 미국 뉴욕 병실에서 제자이자 사위인 윤형근에게 보낸 엽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연 ‘윤형근 회고전’에 나왔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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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야 새삼스럽게 소개할 이유가 없는 인물. 국내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의 한계는 오로지 김환기뿐’이라 불리는 바로 그다. 그렇다면 그런 그이를 평생 아버지로 불렀다는 윤형근은 누구인가.
그래. 시작은 여기서부터여야 할 듯하다. 한 남자가 화가의 작업실로 보이는 공간에 섰다. 베레모를 눌러쓴 청바지와 청재킷 차림.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은 꺼내 불끈 쥐었다. 움켜쥔 주먹이 말해주듯 눈빛엔 결연한 의지가 흐른다. 그런데 그이의 왼쪽과 오른쪽을 가른 그림 두 점이 시선을 잡아끄는데. 왼쪽은 분명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인데 오른쪽은? 바로 그 남자, 윤형근이 ‘천지문’(天地門)이라 명명한 그림 ‘청다색’이다.
| 1974년 10월 김환기 타계 직후 윤형근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촬영한 사진. 왼편에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를 걸고 오른편에 ‘천지문’이라 명명한 신작 ‘청다색’을 걸었다. ‘김환기에게서 출발’한 화업을 ‘김환기로부터 결별’로 다시 세우겠다는 선언인 셈이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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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타계 후 슬픔에 빠져 있던 윤형근이 자신의 서교동 화실에서 찍었다는 이 한 장의 사진. 이는 ‘김환기에게서 출발’한 화업을 ‘김환기로부터 결별’로 다시 세우겠다는 선언이었던 셈이다. 그이의 나이 46세던, 1974년 10월 몹시 불행했던 어느 날이다.
△‘스승이자 아버지’ 김환기의 ‘색’ 빼낸 사연
“예술의 길. 나는 그 좋아라 했던 20대 청춘을 악몽 속에서 지냈다. 그래서 다사롭고 고운 색채가 잠깐 사이에 사라지고 어둡고 살거운 빛깔로 되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1986년 9월 19일 일기 중). 맞다. 초기작은 그랬다. ‘다사롭고 고왔다.’ 김환기의 영향이었다. 서울대 입학시험장에서 심사위원과 입시생으로 처음 만났다는 김환기가 그이의 인생을, 화폭을 송두리째 흔들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그가 화면에서 일체의 색을 뽑아버렸다. 김환기도 뽑아버렸다. 하얀 캔버스도 과하다 싶었나. 누렇고 거친 면포·마포가 뚫어지도록 내리긋고 그어 칙칙하고 어두운 기둥만 남겼다. 더 정제하고 더 단순하고 더 순수한, 그래서 고목인 듯 서까래인 듯 아니 무덤을 덮은 흙인 듯했다. “잔소리가 많고 하늘에서 노는 그림”이라 맹비난(?)했던 장인 김환기를 벗어던진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 소리”처럼.
| 윤형근의 ‘다색’(Umber·1988∼1989). 강원도 오대산 숲길에 쓰러진 거목을 보고 제작했다는 작품이다. 고목이 시커멓게 흙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목도하고 한동안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흙색이 진해진 폭 33.5㎝ 길이 205㎝의 대작이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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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에 ‘윤형근 회고전’을 펼쳤다. 초기작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린 40여점을 비롯해 스케치북 등에 남긴 드로잉 40여점, 그간 누구도 감히 들여다보지 못했던 일기·편지·작업노트·사진 등 아카이브 100여점, 여기에 주인 잃은 작업실을 온전히 지켜온 고가구·도자기·소품까지 모두 옮겨왔다.
윤형근의 색은 단 두 가지다. 울트라마린이란 깊고 푸른 ‘블루’와 마치 종이를 태운 듯한 진한 암갈색 ‘엄버’. 이를 두고 윤형근은 이렇게 기록했다. “내 그림 명제를 ‘천지문’이라 해본다. 블루는 하늘이요 엄버는 땅의 빛깔이다. 그래서 천지라 했고 구성은 문이다”(1977년 1월 일기 중).
| 윤형근의 초기작 ‘청색’(1972). “다사롭고 고운 색채”가 남아 있던 ‘잠깐 사이’였다. 김환기의 푸른빛이 우러난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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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을 섞으면 마치 처음부터 검정이었던 듯한 오묘한 색을 내는데, 흔히 알려진 검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를 가공하지 않은 면·마 등 ‘생천’에 앉혀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몇 날 몇 달을 긋고 그어 완성하는 것이다. 블루와 엄버 두 색의 비율에 따라, 천의 올과 성김에 따라 작품은 조금씩 변형하기도 했다. 푸른빛이 강한 초기 연작 ‘청다색’(1970년대)을 거쳐 강력한 암갈색이 지배한 연작 다색(1980∼1990년대 중반), 또 깊은 지층 아래서 길어올린 듯한 흙빛을 띤, 이름뿐인 ‘청다색’(1990년대 중반∼2000년대 후반)까지. 수묵화인 양 연하게 번져나가는 ‘한지실험’ 효과는 김환기의 제안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비록 김환기를 극복하려 애썼으나 전통과 모더니즘에 대한 공통의 관심까지 버리진 못했던 거다.
하늘과 땅 사이에 꼿꼿한 기둥이던 ‘천지문’이 뒤흔들리는 사건은 한 차례 더 있다. 1980년 광주민주항쟁. 4·19세대였던 그에겐 피가 거꾸로 솟는 일이었단다. 단단하게 곧추섰던 기둥은 뽑힐 듯 사선으로 기울이고 눈물 같은 번짐을 쏟아낸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한 ‘다색’(1980) 두 점이다.
| 윤형근의 ‘다색’(Burnt Umber·1980). 폭 181.6㎝ 길이 22.8.3㎝에 달하는 작품은 1980년 광주민주항쟁 직후 울분을 참지 못해 ‘마당’으로 뛰쳐나가 그린 작품으로 알려졌다. 그간 단단하게 곧추섰던 기둥은 뽑힐 듯 사선으로 기울이고 눈물 같은 번짐을 쏟아냈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공개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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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하다 못해 눌려 죽을 듯한 ‘오묘한 검정’
“이 땅 위의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은 시간의 문제이다. 나와 나의 그림도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된다”(1990년 일본 우에다갤러리 개인전 작가노트 중).
파란 많은 인생이었다. 파평윤씨 대종손인 지식인 아버지를 둔 그는 일본어를 모국어로 중고교시절을 보냈다. 해방을 맞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 가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터진 한국전쟁. 학창시절 시위전력으로 보도연맹에 끌려가 총살당하기 직전 살아남는 고비를 겪는다. 1947년 어렵게 입학한 서울대에선 ‘국립서울대 설립안’ 반대시위에 참가했다가 재적을 당하고 홍익대로 편입학한 건 1954년. 때마침 홍대 교수로 옮겨간 김환기를 다시 만난다. 하지만 전쟁 중 피란가지 않고 서울서 부역했다는 명목으로 1956년 뒤늦게 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 복역까지 치러낸다.
| 윤형근의 ‘청다색’(Burnt Umber & Ultramarine·1998).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작품은 더 담백해지고 더 단순해진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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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입학 후부터 10년 만인 1957년 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 결혼을 하고 1961년 숙명여고로 부임한 이후 얼마간은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그리 녹록하던가. 1973년 숙명여고의 부정입학을 터뜨린 사건이 ‘반공법’ 위반의 탈을 쓰면서 고초를 당하고 서대문형무소에 다시 수감되는 일이 벌어지고야 만다. 한 달여 만에 풀려나긴 했지만 이후 10년은 유배 아닌 유배생활이었다. 그 와중에 인생의 중심에 세웠던 스승이자 아버지인 장인 김환기도 떠나보냈다.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는 괜한 수사가 아니다. 당시 유일한 친구였다는 조각가 최종태(86)와 매일 술을 마시며 그 10년간 엄청난 작품을 쏟아냈으니. 넓적한 붓에 끈끈한 한을 잔뜩 묻혀, 묵직하다 못해 눌려 죽을 것 같은 ‘오묘한 검정’을 빼낸 숱한 작품들 말이다. 그 검정 때문인가. 사후 불현듯 ‘단색화 바람’이 불며 윤형근도 ‘어쩔 수 없이’ 단색화가가 됐다. 자신의 의도와는 별로 상관없을, 그저 세인이 편하고자 조치한 불친절한 배려였을 수도 있다. 그저 그이는 이렇게 말했을 뿐인데. “예술은 심심한 거여.”
“오후 4시 10분. 나가야겠는데 돈이 없다. 옷 주머니를 모조리 찾아봐도 없다. 돈은 마누라한테 있는데, 어디에 감췄는지 없다. 마누라한테도 얼마 없을 게다”(1977년 월일 미상 일기). 그날 이후 40년. 지난해 윤형근의 작품은 44점 21억 1237만원어치가 팔려나갔다. 그래서 “예술은, 가장 아름다운 예술은 슬픈가 보다.” 그이의 말처럼. 전시는 12월 16일까지다.
| 서울 마포구 서교동 윤형근 아틀리에의 모습. 윤형근의 작품에 반했다는 미국 미니멀리즘 대표작가 도널드 저드(1928~1994)의 작품이 중심을 잡고 양옆으로 윤형근의 소품이 보인다. ‘윤형근 회고전’에선 이 중 일부를 옮겨왔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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