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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심혈관 질환자였다. 그러나 증언에 따르면 그가 쓰러진 날 항상 동행했던 주치의들은 휴가를 떠났고, 치과의사만 동행했다. 제대로 된 응급처치가 됐을 리 만무하다. 이후 평양에 있던 심장충격기(AED) 1대와 의료진을 실은 헬기가 급파됐지만, 착륙을 시도하다 떨어져서 폭파됐다. 결국 의료진은 전원 사망했고, 응급처치 지연으로 김일성은 사망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살해설’과 ‘방치설’은 꾸준히 제기됐다. 남북정상회담 앞두고 두 남자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 그 이유다. 김일성은 숙원이었던 통일연방제가 남북정상회담에서 논의된다는 것에 들떠있었다. 체제 존속은 물론 적화통일까지 노려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정일은 이를 반대했고 오히려 폐쇄적인 사회주의 유지를 위해 힘썼다.
특히 증언에 따르면 사망 전날 김일성은 향산특각에서 철도상에게 배급제가 끊겼다는 사실을 보고받았고, 김정일을 불러들여 질책했다. 얼굴을 맞대고 말싸움까지 벌인 것으로도 전해졌다. 이후 김정일은 평양으로 돌아갔고, 한밤중 김일성이 위독하다는 내용을 보고받았지만, 신속하게 대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상 김일성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주장이다.
일각에선 김일성 사망 다음 날 북한 방송이 내보낸 특별 뉴스를 근거로 김정일에 의한 살해설, 방치설을 주장한다. 이례적으로 북한 방송은 첫 보도로 애도가 아닌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후 방송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 1994년 7월 8일 2시에 급병으로 서거하셨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온 나라 전체 인민들에게 알린다”고 발표했다.
이후 김정일은 권력을 승계했다. 김일성 사망 후 3년의 ‘유훈통치’가 끝나자마자 조선노동당 총비서의 자리에 올랐다. 1998년에는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해 주석제를 폐지하고 권한이 더욱 강화된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됐다. 2010년 당대표자회에선 당 총비서, 당 정치국 상무위원, 당 정치국 위원, 당 중앙군사위 위원장, 당 중앙위 위원 등에 선임됐다.
한편, 김일성의 시신은 현재 평양의 금수산태양궁전(구 주석궁·금수산의사당)에 안치돼 있으며, 북한은 1998년 5월에 헌법을 개정해 김일성에게 ‘공화국의 영원한 주석’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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