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대사로 유명한 ‘살인의 추억’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로 유명하다. 해당 대사는 여러 건의 범행에도 긴 시간 동안 잡히지 않은 범인을 향한 경고이자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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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이춘재를 특정하기 한 달 전쯤 화성 연쇄살인사건 피해자들이 남긴 증거물들을 다시 살펴보던 도중 한 피해자의 옷에 남아있던 제3의 유전자를 채취했다. 이춘재는 이 1차례 사건의 피해 여성의 속옷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했다. 해당 피해자는 1990년 11월 15일 살해된 화성 사건 9차 사건의 피해자 13살 중학생이었다.
또 다른 1차례 사건 피해자의 유류품 중에서도 이춘재와 일치하는 DNA가 나온 것으로 파악됐다.
그는 용의자로 지목된 순간부터 경찰 및 프로파일러와 8차례 대면조사에도 계속 혐의를 부인해 왔으나 돌연 마음을 바꿔 그해 10월 1일 모든 혐의를 인정했다. 이춘재는 화성 사건 9건을 포함한 총 14건의 살해를 고백했다.
이춘재는 화성이 아닌 결혼 후 청주에서 벌인 ‘처제 살인 사건’으로 복역 중이었다. 그는 1994년 1월 충북 청주시 흥덕구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처제 이모 씨(당시 20세)에게 수면제를 탄 음료를 먹인 뒤 성폭행하고 망치 등으로 머리를 수차례 때려 숨지게 한 다음 유기한 혐의로 1심과 2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하급심과 달리 “살인 범행을 사전에 계획한 것으로 볼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며 1995년 1월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다. 이후 4개월 뒤 파기환송심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됐고 그해 형이 확정됐다.
결국 이춘재가 교도소에서 시간을 보낼 때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공소 시효는 만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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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전문가도 “밧줄을 쓰면 금방 할 수 있는 일을 스타킹으로 했다. 이는 비효율적인 도구다. 그리고 이것은 사냥감을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의미에서 나온 행동으로 보인다”고 했다.
1987년 1월 10일 발생한 5차 사건에서 이춘재의 DNA가 드러났다. 피해자는 18세 고등학생으로 태안읍 황계리 논바닥에서 스타킹으로 결박돼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4개월 뒤 5월 2일 퇴근하는 남편에게 우산을 가져다주기 위해 집을 나선 30세 여성이 태안읍 진안리 야산에서 성폭행 당한 뒤 숨진 것으로 보이는 6차 피해자가 발견됐다.
1988년 9월 7일 7차 사건이 일어났다. 52세 여성이 귀가하던 중 피습돼 팔탄면 한 농수로에서 옷가지로 양손이 결박돼 숨진 채 발견됐다. 이 이후 성폭행 현장을 가까스로 탈출한 피해 여성과 용의자를 태운 버스운전사 등의 진술을 바탕으로 범인을 24세부터 27세까지 키 165~170cm의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성으로 특정됐다.
이는 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1988년 작성해 배포한 몽타주였으며, 이춘재의 모습과 흡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5개월 뒤 1991년 4월 3일 69세 여성이 동탄면 야산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이 사건을 마지막으로 화성 연쇄살인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춘재는 9건의 화성 사건 외에도 화성 3건과 청주 2건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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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5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 출연한 수원남부경찰서 강력계 이성준 형사는 이춘재를 직접 대면하며 느낀 느낌을 이렇게 밝혔다.
“범행을 하는 장면을 묘사할 거 아닌가. 어떻게 피해자를 조우했고 어떻게 제압해서 어디로 끌고 가서 어떻게 범행을 하고, 이런 것들을 이제 영화에나 나올법한 얘기들을 덤덤하게 했다. 남 얘기하듯이. ‘인간세상에 악마가 있다면, 이춘재가 악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이춘재는 용의자로 특정된 후 이 형사와의 접견에서 이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처음 접견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교도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경기도에서 왔다고 하더라. 경기도라면 화성 사건 밖에 없으니, 그때부터 왜 왔는지 알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며 “몇 년 전 교도소에 있을 때 입안 점막에서 DNA를 채취해 갔다. 그때 곧 저를 잡으러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좀 늦게 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