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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호는 곧장 응전을 시작했다. 아군의 지원사격까지 더해진 우리의 공격에 북한군은 교전 25분 만에 퇴각했다. 북한 대형 경비정이 화염에 휩싸여 예인선에 이끌려 갔다. 북한군 30여 명이 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군은 1999년 제1연평해전에 이어 재차 북한의 도발을 막아낸 것이다. 승전에는 피의 희생이 뒤따랐다. 정장 윤영하 소령(당시 계급은 대위)은 교전을 지시하다가 피격당해 전사했다. 조타장 한상국 상사(당시 중사)와 황도현 중사(당시 하사), 조천형 상사(당시 하사), 서후원 중사(당시 하사)이 교전 과정에서 전사했다. 방아쇠를 꽉 쥔 채였다. 의무병 박동혁 수병(상병)은 전투 후유증으로 숨을 거뒀다. 전사자 6명을 비롯해 1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국방부는 ‘교전은 정전 협정 위반이고 무력 도발’이라고 북한에 사과와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북한은 우발적인 충돌이라고 반응했다. 교전은 북한군이 당시의 패배에 대한 복수전 성격으로 분석됐다. 한일월드컵으로 한국의 위상이 치솟는 데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도발이라는 시각도 있다. 교전 직후 여론은 월드컵에 휩쓸려 분산돼 있었다.
정부 대응이 도마에 올랐다. 김대중 대통령은 교전 이튿날 일본으로 출국했다. 한일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하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위해서였다. 출국하지 않으면 북한 의도를 따르는 것이라서 강행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해군장으로 치른 장례식에 군 수뇌와 정부 관계자, 정치 지도자 대부분은 참석하지 않았다. 남북 평화를 유지하던 정부 기조를 무시하지 못했다. 한상국 상사의 부인은 정부와 여론의 냉대에 실망하고 미국에 이민을 갔다.
해군은 군함에 전사자 이름을 붙여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윤영하함(2007년 6월)을 시작으로 한상국함·조천형함(2009년 9월), 황도현함·서후원함(2009년 12월), 박동혁함(2010년 7월)이 진수돼 영해를 누비고 있다. 승전은 2015년 영화 연평해전으로 각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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