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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가 쓴 ‘고리오 영감’(1835)에는 ‘시시한 인간’들이 나온다. 프랑스혁명의 수혜를 받아 벼락부자가 됐다가 전락해 비루한 하숙집에 살며 사람들의 놀림감이 돼버린 고리오 영감. 성공을 꿈꾸며 파리로 상경해 불륜과 허영, 기만과 속임수가 판치는 사교계의 게임방식을 배우고 동경하는 청년 라스티냐크. 아버지의 자금력으로 대귀족·은행가와 결혼한 두 딸. 이 둘은 아버지의 돈을 마지막까지 짜내면서도 끝내 몰락한 아버지와 한 응접실에서 차도 마시지 않는 속물이다. 사실 소설에 등장하는 이들은 혁명과 변혁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초인이 아니다. 오히려 혁명이 굴리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신음하면서도 성공의 기회를 엿보며 매일매일의 욕망에 충실한 시시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데 어째서 이토록 시시한 인간들의 인생을 보고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발자크가 문학의 목표를 ‘혹독한 진실과 사실을 드러내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발자크는 때론 과장하고 때론 단순하게, 세속적인 인생들을 펼쳐놓았다. 시시한 인간들의 삶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소설은 당시 프랑스사회의 모순과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그 속의 삶을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발자크의 문제의식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무관치 않다. 19세기는 과학분야가 놀랍게 발전했던 때다. 원자론이 등장했고, X선과 라듐이 발견되고, 진화론과 세균학이 발달했다. 발자크를 앞세운 프랑스문학의 사실주의는 바로 이러한 과학적인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치를 깨닫고자 하는 실증적 객관주의의 방법론을 취했던 것이다. 막연한 환상과 이상을 표현하기보단 예리한 관찰과 냉정한 거리두기를 통해 사회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다.
육중한 몸체 속 혁신의 무게와 미래 향한 기대 표현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발자크 상’(1898)은 바로 이 작가 발자크를 기리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1891년 프랑스문인협회에서 작품을 의뢰받은 로댕은 이 조각을 준비하며 7년이란 긴 시간 동안 발자크를 공부했다. 발자크가 가진 ‘진정한 사실적 면모’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삶을 추적해 인터뷰하고, 소설을 읽었다. 발자크의 고향 앙주를 찾아가 닮은 모델을 찾아내고 옷차림과 습관, 표정과 자세를 탐구했으며 수없이 많은 스케치를 하고 습작을 했다.
심지어 어떤 습작에는 누드의 발자크, 머리가 없는 발자크가 나타나기도 했고, 작가를 상징하는 흔들의자와 책, 깃털 달린 만년필 등이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7년간의 시도 끝에 로댕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발자크는 뜻밖의 모습이었다. 야수 같은 거친 에너지를 품은, 2m 80㎝에 달하는 거대한 덩어리였던 것이다. 작품을 의뢰했던 문인협회는 크게 당황했고 비평가들은 조롱하느라 바빴다. 석탄포대네, 눈사람이네 하면서 말이다. 석고상으로 처음 만들었던 ‘발자크 상’은 결국 청동으로 만들어지지 못했다. 문인협회가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로댕은 제작비를 환불하고 작품을 되돌려받았다. 그 석고상이 청동으로 제작돼 세상에 빛을 본 건 로댕이 세상을 뜬 지 21년 만인 1938년. 의뢰부터 제작까지 무려 47년이 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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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많고 탈도 많던 ‘발자크 상’에 대해 로댕은 이렇게 설명했다. “난 발자크의 치열한 글쓰기, 그가 맞닥뜨린 고난과 역경에 대해 생각해봤다. 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과 위대한 용기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바로 그 진실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 진실을 어떻게 표현했다는 것인가. 바로 ‘과장과 생략’이다.
발자크 상의 머리와 몸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에너지를 내뿜는다. 한 발을 앞으로 약간 내민 채 비스듬히 기울인 몸통은 형체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육중한 덩어리의 질량감으로 압도한다. 거대한 몸체를 감싼 진짜 석탄포대 같은 로브(성직자의 옷)는 실제 몸의 굴곡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추상적인데도 불구하고 어떤 구체적인 묘사보다도 발자크를 상상케 한다. 창작을 고뇌하며 밤새 서재를 거닐던 그 모습. 그 무게와 압박감이 너무 무거워 땅을 뚫고 들어갈 듯한 기세인 것이다. 반면 얼굴은 저 먼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온통 헝클어진 머리에 찌푸린 표정이지만 두덕두덕 부은 듯 피곤한 얼굴은 중력을 거슬러 세파를 헤치고 미래를 바라본다. 몸과 머리의 방향이 서로 다른 이 조각상을 온전히 감상하기 위해선, 그래서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현실의 무게와 미래의 기대를 꿰뚫을 수 있을 만큼.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MoMA) 조각 정원에서 실제로 ‘발자크 상’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압도감과 당혹감을 기억한다. 야외 정원으로 이어진 미술관의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기 전 바닥에 놓여지다시피 한 발자크와 마주쳤을 때 말이다. 깊게 파인 눈과 굳게 다문 입, 둔중하고 거친 몸체에서 전해지는 감동과 함께, 이 거대한 존재를 내 코앞에서 맞닥뜨릴 수밖에 없도록 설계한 조각가의 대담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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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개인의 위대함을 기리는 조각상을 제작할 때에는 높은 좌대를 같이 만든다. 감상자의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해 그의 위대함을 우러러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유럽의 광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마상이나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 등을 상상하면 그 의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로댕은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던 위대한 인물들을 세울 때조차 좌대를 높이지 않았다. 한 뼘도 안 되는 높이의 좌대에 놓인 발자크를, 조각 특유의 볼륨감은 물론 거칠고 울퉁불퉁한 표면까지 실감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 것이다.
로댕의 또 다른 걸작으로 꼽히는 ‘칼레의 시민’(1884∼1889) 역시 비슷한 전략을 취한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이 한창이던 1346년, 영국 에드워드 3세의 공세에 거세게 저항하던 프랑스 칼레시는 항복의 조건으로 도시 전체를 파괴하는 대신 시민대표 6인의 처형을 선택한다. 선뜻 그 대표로 나선 이들은 시장, 부유한 상인, 법률가 등 귀족 계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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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레의 시민들을 살리기 위해 영국의 왕을 만나러 가는, 바로 그 6인의 시민대표를 묘사한 이 작품은 고뇌하는 영웅의 모습을 형상화하면서도 결코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올려두지 않는다. 심적 고통과 갈등을 애써 견디며 걸어가고 있는 고귀한 이들 하나하나를 감상자는 자신의 눈높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그 눈높이는 6인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배웅해야 했던 칼레시민들의 시점과 일치한다. 칼레시민들은 죄책감과 고마움 속에 이들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을 것이다. 햇빛에 반사된 거칠고 무거운 옷자락과 사슬을 찬 커다란 손과 발은 조각상에 생명력을 더해 칼레시민들이 겪었을 고통의 시간을 현재로 불러낸다. 목에 밧줄을 매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머리를 떨구고 손을 펼친 채 한 걸음 한 걸음 처형대로 향하는 이들과 나란히 섰을 때 얻을 수 있는 깊은 공감은 그 어떤 사실적인 묘사보다 울림있게 진실을 전달한다.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을 거쳐 부지런히 근대사회로 향하던 길목에서 예술가들은 중세시대의 종교적 이상, 르네상스시대의 재현적 사실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의 의미·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진실을 찾아내고자 했다. 드높은 좌대에서 내려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와 키높이를 맞춘 로댕의 조각상들은 시시한 인간들의 삶을 불멸의 예술로 승화시킨 가장 근대적이고 가장 진실된 헌정일 것이다.
△이수연 학예연구사는…
1979년 생. ‘문자보다 이미지’였다. 이미지의 가능성, 이미지를 읽어내는 방식에 자꾸 관심이 갔다.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한 뒤 방향을 틀었다.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백남준 퍼포먼스 연구’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이후 미술전문기획사 사무소(SAMUSO) 등을 거쳐 200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면서 전문영역이 선명해졌다. 무빙이미지·영화·인터넷 등 미디어기술의 발전이 미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 일이다. 내친김에 미국 코넬대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해 미디어기술을 입은 시각문화가 끝없이 진화하는 현장을 학술연구와 연결하는 일에까지 욕심을 냈다. 백남준 탄생 90주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올 가을에 열 ‘백남준 효과’ 전 준비에 여념이 없다.